가장 완벽한 기호, 런던 '라운델(Roundel)'
전 세계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그 도시의 성격을 단 하나의 기호로 요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런던만큼은 예외죠. 붉은 원과 푸른 바(Bar)가 결합된 간결한 심볼, ‘라운델(Roundel)’은 단순한 교통 로고를 넘어 런던이라는 거대 도시의 맥박이자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위대한 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피썹-앝’이 100년 넘게 변치 않는 생명력을 유지해온 이 원형의 미학을 파헤쳐 봅니다.

혼돈의 도심 속에서 찾은 명료함
1900년대 초, 런던의 지하철 체계는 여러 사설 철도 회사가 뒤섞여 승객들에게 극심한 혼란을 주던 장소였습니다. 당시 런던 지하철의 상업 책임자였던 프랭크 픽(Frank Pick)은 이 혼란을 잠재울 강력한 ‘시각적 통합’이 필요함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목적지를 안내하는 표지판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복잡한 도심의 시각적 공해 속에서도 한눈에 띄는 ‘결정적 인상’을 원했습니다. 1908년 처음 등장한 라운델은 당시 ‘황소의 눈(Bull’s eye)’이라 불리며, 역 이름이 적힌 흰색 바가 빨간색 원을 관통하는 파격적인 형태로 탄생했습니다. 이는 정보 전달이라는 기능성에 예술적 상징성을 덧입힌 근대 디자인의 역사적인 도약이었습니다.

로고에 영혼을 불어넣은 타이포그래피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세련된 라운델의 모습은 1910년대 중반, 서체 디자이너 에드워드 존스턴(Edward Johnston)의 손길을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존스턴은 라운델의 비례를 정교하게 다듬는 동시에, 그에 걸맞은 전용 서체인 ‘존스턴 산스’를 개발했습니다.
존스턴은 원의 두께와 바의 너비를 수학적으로 재조정하여 시각적 안정감을 극대화했습니다. 이 간결한 형태는 멀리서도 지하철역의 존재를 알리는 강력한 신호등 역할을 수행했죠. 대문자 ‘O’를 완벽한 원으로 설계한 존스턴 서체는 라운델 로고와 완벽한 일체감을 이룹니다. 이 서체는 훗날 길 산스(Gill Sans) 등 현대적인 산세리프 서체들의 모태가 되었으며, 런던이라는 도시 전체에 통일된 디자인 언어를 부여했습니다.

브랜드가 된 공공 디자인
라운델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공공 디자인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런던 교통공사(TfL)는 이 로고를 지하철(Underground)뿐만 아니라 버스, 오버그라운드, 엘리자베스 라인 등 모든 교통 수단에 변주하여 적용했습니다.
각 교통수단마다 고유의 색상을 부여하면서도 라운델이라는 기본 골격은 유지함으로써, 런던 시민들에게는 신뢰를, 여행자들에게는 명확한 가이드를 선사합니다. 이제 라운델은 기념품점의 티셔츠부터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 이르기까지 런던의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가장 럭셔리한 시각적 장치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런던의 라운델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진정한 클래식은 시대의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기능에 예술적 비례를 더했을 때 탄생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