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불꽃이 남긴 흔적, 이배(Bae Lee
최근 뉴욕 록펠러 센터 채널 가든에 우뚝 선 6.5m 높이의 거대한 숯 조각
2023년 뉴욕의 중심부를 묵직한 에너지로 채우고, 이어 2024년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를 통해 전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이끈 작가 이배의 작업은 단순한 물질의 제시를 넘어 깊은 사유를 이끌어냅니다. 일찍이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2013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기사장을 수훈하며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그는 한국의 미학을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해 내는 예술가입니다. 그에게 숯은 나무가 불이라는 극한의 에너지를 견뎌내고 남긴 생명의 마지막 형태이자, 새로운 창조를 향한 첫 번째 질료입니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직 ‘숯’이라는 본질에 천착해 온 그의 궤적은, 오늘날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리의 이방인, 흑빛을 발견하다
이배 작가의 예술적 여정은 1990년, 서른네 살의 나이에 무작정 떠났던 도불(渡佛, 프랑스(佛蘭西)로 건너가다(渡))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파리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고, 값비싼 물감을 살 여력이 없었던 이방인 화가는 우연히 동네 마트에서 바비큐용 숯 한 포대를 발견하게 됩니다. 서양의 얇은 목탄과는 궤를 달리하는, 불의 온기를 고스란히 머금은 거친 숯덩이는 그에게 잊고 있던 동양의 수묵과 한국적인 정서를 일깨워주었죠. 이 초기 작업 시기, 그는 숯을 짓이기고 문지르며 캔버스 위에 거친 인체와 형상들을 그려냈습니다. 가난과 고독 속에서 선택한 이 원초적인 재료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매개체가 되었으며, 훗날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어주었습니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생명력
이후 그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며 미술계의 주목을 이끌어낸 첫 번째 대표작은 단연 ‘이슈 뒤 푸(Issu du feu, 불로부터)’라는 개념의 연작입니다. 섭씨 1,000도가 넘는 가마 속에서 며칠 밤낮을 견뎌낸 한국의 참숯을 캔버스에 빽빽하게 붙인 뒤 표면을 갈아내고 연마하는 고된 노동을 거친 작품입니다. 이 수행적 행위를 통해 숯은 본래의 거친 물성을 잃고 마치 벨벳이나 흑요석처럼 매끄럽고 윤기 나는 검은 빛의 군집으로 재탄생하죠. 두 번째 대표작인 ‘붓질(Brushstroke)’ 시리즈는 아크릴 미디엄과 숯가루를 섞어 캔버스 위에 단숨에 그어 내리는 작업으로, 서예의 일필휘지를 연상케 하며 정지된 화면 위에 역동적인 기운(氣韻)을 불어넣습니다. 이 두 평면 작업은 소멸의 상징이었던 숯이 영원성을 획득하는 물성의 전환을 묵묵히 보여줍니다.

흑과 백, 무한의 캔버스가 품은 동양적 우주관
최근의 작업에서 그의 숯은 평면을 넘어 거대한 공간과 건축적 스케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의 세 번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불로부터(달집태우기)’ 모티브의 대형 설치 작업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록펠러 센터에서 선보인 이 거대한 숯 조각과 미디어 아트의 결합은, 정월 대보름에 소원을 빌며 달집을 태우는 한국의 전통 의식을 현대 미술의 공간으로 소환한 것입니다. 숯의 형상을 그대로 청동으로 주조해 낸 브론즈 조각들은 물질의 물성을 영원의 시간으로 기록하는 시도입니다. 서양의 미니멀리즘이 물질의 환영을 제거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배의 흑백은 음양의 조화와 순환이라는 동양적 우주관을 시각화합니다. 격렬한 삶의 불꽃이 지나간 자리, 내면에는 어떤 단단한 본질이 남아 있느냐는 조용한 철학적 질문을 건네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