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조각하는 마법사-아니쉬 카푸어
거대한 빈 공간에서 시작된 여정
1954년,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난 아니쉬 카푸어는 인도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자란 그는 ‘경계를 허문다’는 개념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허무는 일이 결국 그의 예술 세계의 핵심이 됩니다.
1970년대 중반,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호른지 예술대학과 첼시 예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하며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당시 서구 예술계에서 동양적 철학과 감성을 녹여낸 그의 조각들은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았습니다. 특히 그는 정신분석학자 칼 융(Carl Jung)이 제시한 인간의 원형적 이미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을 뒤집어 놓은 조각 – 존재와 부재 사이
카푸어의 작품을 마주하면 사람들은 종종 혼란에 빠집니다. ‘이게 조각이라고?’ ‘이게 비어 있는 건가, 차 있는 건가?’ 그의 작품들은 물리적 형태를 뛰어넘어 시각적 착각과 개념적 깊이를 동시에 전달합니다.
그의 대표작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일명 ‘The Bean’은 그를 세계적인 예술가로 만든 작품입니다.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 한가운데 설치된 이 반짝이는 강낭콩 모양의 조각은 하늘과 도시, 사람들을 반사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한순간도 똑같지 않은 이 작품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과 공간이 끊임없이 소통하는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그의 또 다른 대표작 ‘Svayambhu’는 거대한 붉은 왁스 덩어리가 좁은 문을 통과하며 흔적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피와 살점이 묻어나는 듯한 강렬한 이미지에 압도됩니다. 카푸어는 작품을 통해 ‘시간이 흐르는 과정’을 조각으로 표현하는 시도를 합니다.


빛을 삼키는 검은 구멍, 그리고 논란
아니쉬 카푸어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빛을 삼키는 가장 검은 색’을 손에 넣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반타 블랙(Vantablack)’을 독점 사용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섭니다.
반타 블랙은 99.965%의 빛을 흡수하는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물질로, 이를 칠한 조각은 마치 차원이 사라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색을 독점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다른 예술가들은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응해 영국의 또 다른 아티스트 스튜어트 셈플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핑크색(Pinkest Pink)’을 발표하는 등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아래 글에서 이 논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조각이 건축을 만나면 – 아니쉬 카푸어의 미래
그의 작품들은 이제 단순한 조각을 넘어 건축과 결합하며 도시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그의 곡선과 반사, 깊이를 활용한 작품들은 사람들이 머무르고, 경험하고, 사유하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드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감각의 경험’입니다. 그의 조각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평범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문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니쉬 카푸어는 건축과 조각, 그리고 회화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로 유명합니다. 그림일까? 조각일까? 건축물일까? 이렇게 고민하는 관람객에게 <노랑>은 뒤늦게 답을 알려줍니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노랑>은 그림이 아닌 조각이라는 것을요. 작가는 <노랑>을 완성하기 위해 3미터의 홀을 만들고 그 위에 노란색 안료를 12번 덧칠했다고 합니다. 이에 저토록 선명한 노란색이 완성된 것이죠. 3미터의 홀을 벽에 만들었다니 그 벽의 외관이 무척 궁금하실 텐데요. 미술관은 <노랑>을 설치하기 위해 가벽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벽 뒤에는 실제 미술관 벽을 숨겨 놓았다고 하네요.
“조각은 단순한 물체가 아니다. 그것은 공간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경험을 바꾸는 힘을 가진다.” – 아니쉬 카푸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