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코르뷔지에 — 인간의 삶을 ‘설계’한 근대건축의 아버지
젊은 장인에서 건축가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본명 샤를-에두아르 잔느레, 1887–1965)는 스위스의 작은 시골 마을 라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계 제작자, 어머니는 피아노 교사였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건축가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5세에 장식예술학교(École d’Art)에 입학해 그의 아버지처럼 시계 장식과 조형 디자인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사 샤를 레플라트니에(Charles L’Eplattenier)가 “예술적 감각을 건축으로 확장하라”고 권했고,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첫 번째 작품인 ‘빌라 팔라트(Villa Fallet, 1907)’를 설계하며 건축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 건물은 스위스 산악풍의 목조주택이었지만, 이미 구조적 질서와 기하학적 감각이 두드러졌습니다.
20대 초반 그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그리스, 터키 등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고대 건축과 산업화된 도시의 대비를 경험했습니다. 이 여행은 그의 사상적 기반을 다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이때 ‘기능이 형태를 결정한다’는 확신을 얻었고, 전통 양식 대신 기계 문명에 걸맞은 새로운 건축 언어를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에서의 전환 —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의 탄생
1917년 그는 파리로 이주해 예술가 아메데 오장팡(Amédée Ozenfant)과 함께 ‘순수주의(Purism)’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들은 예술에서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하고, 단순하고 명확한 형태만을 남기려 했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그의 건축 철학으로 이어졌습니다.
1920년대 잡지 『레스프리 누보(L’Esprit Nouveau)』에 글을 기고하면서 그는 필명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그의 외할머니 성씨 ‘르 코르뷔지에-그리’에서 따온 이름이었고, 개인 샤를 잔느레에서 사상가 르 코르뷔지에로의 변신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이제 단순한 건축가가 아니라, 근대 사회를 새롭게 설계하려는 ‘사상가’가 되었습니다.

돔-이노 시스템 — 근대건축의 뼈대를 세우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시기 르 코르뷔지에는 ‘돔-이노 시스템(Dom-Ino System)’을 고안했습니다. 이는 기둥과 슬래브만으로 구성된 단순한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벽체는 하중을 지탱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는 혁신적 개념이었습니다. 그는 6개의 기둥 위에 수평 슬래브를 얹고, 계단을 한쪽에 배치하는 모듈 구조를 제시했는데, 이를 통해 대량생산이 가능한 주택의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돔-이노는 단순한 구조 실험을 넘어, 건축의 산업화와 표준화를 가능케 한 근대 건축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 건물 구조가 이 기본 원리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돔-이노는 현대건축의 DNA라 할 수 있습니다.

빌라 사보아 — 근대건축의 원형
1929년 완성된 ‘빌라 사보아 (Villa Savoye)’은 르 코르뷔지에의 철학을 집약한 대표작입니다. 그는 여기서 ‘근대건축의 5원칙’을 실험했습니다.
- 필로티(Pilotis) — 건물을 기둥 위에 띄워 지면에서 분리.
- 자유로운 입면(Free Facade) — 외벽을 구조에서 분리해 자유로운 조형 가능.
- 수평창(Ribbon Windows) — 일정한 빛을 고르게 들이기 위한 긴 창.
- 자유로운 평면(Free Plan) — 구조벽 없이 공간을 유연하게 구성.
- 옥상 정원(Roof Garden) — 대지의 녹지를 지붕 위로 옮김.
이 집은 외형적으로는 단순한 하얀 박스이지만, 철저히 기능에 의해 결정된 형태입니다. 그는 건축을 “살기 위한 기계(a machine for living)”라고 불렀고, 사보아 저택은 그 문장의 실제 구현이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건축가들이 이 원칙을 토대로 주거와 도심의 형태를 다시 설계했습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 — 인간을 위한 도시 실험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습니다. 그는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공동주거의 새로운 형태를 제안했습니다. 1952년 프랑스 마르세유에 지어진 이 건물은 아파트, 상점, 체육관, 유치원까지 모두 포함한 ‘수직 도시’였습니다.
각 세대는 햇빛이 고르게 들어오도록 설계되었고, 건물 안에서 대부분의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화된 구조는 동시에 획일화된 인간의 삶을 낳는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그는 효율적인 도시를 만들고자 했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의 감정과 다양성이 희생될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죠.

롱샹 성당 — 기능을 넘어선 감정의 공간
1955년 완공된 ‘롱샹 성당(Chapelle Notre-Dame-du-Haut)’은 르 코르뷔지에의 후반기 변화를 보여줍니다. 이곳은 콘크리트로 지어졌지만, 기존의 직선적 구성 대신 두꺼운 곡선벽과 불규칙한 빛의 구멍이 특징입니다. 내부는 자연광이 벽을 타고 흐르며 시간에 따라 색이 변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로운 체험을 제공합니다.
그는 이 건물에서 구조적 합리성보다 공간이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에 집중했습니다. 이전까지 ‘기계적 건축’을 주장하던 그가 ‘신앙과 감정의 건축’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롱샹은 그의 사상적 전환점을 의미합니다.

카바농 — 거대한 도시에서 가장 작은 집으로
생의 말년에 그는 프랑스 남부 카프 마르탱(Cap Martin) 해변에 ‘카바농(Cabanon)’이라는 소형 주택을 지었습니다. 단 3.6m x 3.6m의 크기, 모든 가구는 치밀한 비례로 설계되었습니다. 그는 이 집을 ‘완벽한 주거 단위’라 불렀고, 이후 소형 주택 디자인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의 이상향을 설계하던 그가 가장 단순한 집에서 평온을 찾았다는 점은 그의 사상을 가장 명확히 드러냅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생애 동안 기능주의, 모듈러(Modulor) 비례, 도시계획, 그리고 인간 중심 공간의 가능성을 탐구했습니다. 그는 냉정한 합리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인간의 삶을 더 나은 구조로 조직하고자 한 근대의 이상주의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