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밑의 예술, 일본 맨홀의 세계
도시의 바닥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예술이 있습니다.
비 오는 날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반짝이며 시선을 끄는 그것, 바로 일본의 ‘맨홀 아트’입니다. 단순한 도시 인프라의 일부로만 여겨졌던 이 둥근 금속판은 이제 일본을 대표하는 공공미술의 아이콘이 되었죠.

비밀스러운 탄생 – 1980년대의 ‘시민참여형 예술 실험’
일본의 맨홀 디자인은 1980년대 초반, 한 평범한 행정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습니다.
1985년 일본 건설성(현 국토교통성)은 “지역마다 다른 맨홀을 만들자”는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당시 지방 도시들은 ‘하수도 건설 예산’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이 아름다운 맨홀이 우리 마을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을 심어주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이후, 각 지자체는 자치의 상징을 맨홀 위에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현의 꽃, 동물, 지역 캐릭터, 성곽이나 축제, 그리고 유명 산과 강까지. 이 작은 원판은 곧 일본의 ‘로컬 아이덴티티’를 품은 캔버스가 되었죠.

도시마다 다른 얼굴: ‘지상으로 드러난 디자인 DNA’
홋카이도의 삿포로에는 눈의 결정 패턴과 시계탑, 교토에는 게이샤와 절풍경, 오카야마에는 모모타로 전설이 새겨져 있습니다. 도쿄 세타가야에는 고양이가, 군마현에는 온천 원숭이가 등장하죠. 이처럼 각 지역은 맨홀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 밑의 예술’로 남기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현재 약 12,000종 이상의 디자인 맨홀이 존재하며, 일부는 한정판처럼 수집가들의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맨홀 뚜껑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를 활용한 다양한 굿즈도 등장했습니다. 특히 2016년, 하수도 홍보를 위해 제작된 ‘맨홀 카드’가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단순한 전단 대신 디자인된 카드를 무료로 배포하자, 사람들은 맨홀 카드를 얻기 위해 지자체나 시청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맨홀 카드의 인기는 폭발적이었으며, 1년 만에 총 222종이 발행되고 100만 장 이상이 배포되었습니다. 카드뿐만 아니라 열쇠고리, 종이컵 받침, 미니어처 맨홀 등 다양한 굿즈가 등장했고, SNS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죠.
맨홀 카드는 각 지역에서만 구할 수 있어 희소성이 높습니다. 이로 인해 맨홀 카드를 찾기 위해 외지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일부는 인터넷 경매에서 한 장당 20만 원에 거래되기도 합니다.


가장 사랑받는 협업: 포켓몬 맨홀 ‘포켓후타(ポケふた)’
그리고 일본 맨홀 문화의 정점에는 포켓몬이 있습니다. 2018년, 포켓몬 컴퍼니는 일본 각지의 지자체와 협력해 ‘포켓후타(Poké Lids)’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피카츄, 이브이, 거북왕, 고라파덕, 리자몽 등 지역 특색에 맞춘 포켓몬이 등장하며, 각 맨홀은 단 하나뿐인 디자인으로 제작되죠.
예를 들어, 홋카이도에는 눈과 얼음을 상징하는 눈썹이 도톰한 이로치 라프라스, 규슈 미야자키에는 태양처럼 밝은 파이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현재 전국 300여 곳 이상에 400개 이상의 포켓몬 맨홀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는 모두 포켓몬 GO의 포켓스톱으로도 연결되어 있죠. 즉, 현실의 발걸음이 게임의 지도 위에서도 이어지는, 완벽한 AR-공공예술의 결합입니다.

발 밑의 예술, 일본의 정체성
맨홀 뚜껑은 단순히 귀여운 디자인을 넘어 일본 지역 관광의 활성화와 문화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자리잡았습니다. 각 지역마다 고유의 디자인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일본 여행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다음 일본 여행에서는 고개를 들어 풍경을 감상하는 것만큼, 발 밑을 향해 시선을 돌려보세요. 길 위의 예술이 당신을 뜻밖의 감동으로 이끌지도 모릅니다. 맨홀뚜껑 하나로 시작된 여정이, 도시와 사람, 그리고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열어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