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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진 기념비, 트라팔가 광장의 네 번째 좌대

미완의 기념비, 도시의 빈자리로 남다

런던의 중심, 트라팔가 광장은 영국 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입니다. 그 중앙에 우뚝 선 넬슨 제독의 동상과 주변의 거대한 건물들은 과거의 영광을 이야기하죠. 그러나 그 북서쪽 한켠에는, 오랫동안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좌대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Fourth Plinth’, 즉 ‘네 번째 좌대’입니다.

Trafalgar Square Redevelopment, London - Norman Foster | Arquitectura Viva
좌측 하단, 어떠한 조형물도 없이 비워진 네번째 좌대

원래 이 좌대는 1841년 건축가 찰스 배리가 웰링턴 공작의 기마상을 올리기 위해 설계한 것이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결국 동상은 제작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50년 동안 ‘기념될 대상을 기다리는 공간’으로 남았던 이 빈 좌대는,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 말 런던의 가장 실험적인 예술 무대로 부활하게 됩니다.

Fourth plinth - Wikipedia

‘비어 있음’이 예술이 되다

1990년대 후반, 영국 왕립예술진흥협회(RSA)는 이 ‘비어 있음’의 의미를 재해석 했습니다. ‘기념’이 부재한 공간은 곧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설 여백이라는 것이었죠. 그 제안은 런던시청의 예술 프로젝트로 이어지며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세 차례의 임시 설치가 진행됩니다. 마크 월린저의 《Ecce Homo》, 빌 우드로의 《Regardless of History》, 그리고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Monument》가 그 시작을 알렸습니다. 세 작품 모두 ‘권력’이나 ‘영웅’이 아닌, 인간의 취약함과 기억의 불완전함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때부터 네 번째 좌대는 더 이상 미완의 구조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형 기념비’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Monument - Mike Smith Studio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Monument》(2001)

시민과 작가가 함께 만든 새로운 기념

2003년, 런던 시장실이 프로그램을 공식화하며 ‘Fourth Plinth Commission’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이 좌대는 매 2~3년마다 새로운 작가를 선정해 현대미술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마크 퀸의 《Alison Lapper Pregnant》(2005)는 장애를 가진 임신한 여성 조각을 통해 기존의 영웅주의 조형 언어를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이어 안토니 곰리의 《One & Other》(2009)는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 2,400명이 한 시간씩 좌대 위에 올라서는 퍼포먼스로, ‘누구나 기념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죠. 2020년 이후에는 한층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작품들이 이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 인물 726명의 석고 캐스트로 구성된 멕시코 작가 테레사 마르골레스의 《Mil Veces un Instante》(2024)는 ‘존재의 흔적이 사라지는 과정’ 자체를 예술로 드러내며, 영국 사회의 젠더·이주·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습니다.

Artichoke Story
안토니 곰리 《One & Other》(2009)
London's fourth plinth artwork aims to 'unite trans community around the  world' | Art | The Guardian
테레사 마르골레스 《Mil Veces un Instante》(2024)

공공미술이 도시를 바꾸는 방식

네 번째 좌대는 단순한 공공 조각 설치를 넘어, 도시가 스스로를 성찰하는 장으로 기능합니다. 매번 새로운 작품이 등장할 때마다 시민들은 ‘이게 예술인가?’, ‘누가 기념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전통적 권위와 위계의 상징이었던 트라팔가 광장이, 그 질문을 통해 민주적 토론의 무대로 탈바꿈한 셈입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기념비’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했습니다. 과거의 동상들이 국가의 영웅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면, Fourth Plinth는 잊혀진 사람들, 소외된 집단,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문제들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Heather Phillipson – interview: 'I wanted to respond to the loaded  political position of Trafalgar Square'
헤더 필립슨 《The End》(2020)

도시 차원에서도 이 프로젝트의 영향은 막대했습니다. 런던시는 Fourth Plinth를 통해 공공미술을 ‘무료로 경험하는 예술관’으로 확장했으며, 매년 수천만 명이 이 광장을 찾습니다. 트라팔가 광장은 이제 더 이상 박제된 제국의 상징이 아니라, 동시대 예술이 숨쉬는 살아 있는 광장으로 변모했습니다. 150년 전 미완의 구조물이었던 좌대는, 오히려 그 ‘결핍’ 덕분에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완벽한 실험실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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