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예술 도시’- 도널드 저드(Donald Judd)
미국 텍사스 서쪽 끝,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곳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과 알루미늄 상자가 끝없이 늘어선 곳, 바로 치나티 파운데이션(Chinati Foundation)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풍경을 만든 주인공이 바로 현대미술의 전설, 도널드 저드(Donald Judd)입니다.
화가에서 ‘공간 예술가’로
저드는 원래 그림을 그리던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캔버스가 주는 평면 세계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왜 작품이 벽에 걸려 있어야 하지?”라는 의문 끝에 그는 재료를 들고 실제 공간 속으로 나왔습니다. 나무, 철, 알루미늄 같은 단단한 재료를 정밀하게 가공해, 작품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로 존재하도록 만든 것이죠.
많은 이들이 그를 ‘미니멀리스트’라 불렀지만, 저드는 이 표현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환경과 어울리며 정확히 존재하는 구조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사막으로 떠난 이유
1960년대 후반, 도널드 저드는 살기 좋고 대규모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미국 남서부 애리조나와 뉴멕시코를 여행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복판, 옛 미군 포병 기지가 있는 소도시 ‘말파’가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버려진 땅과 건물을 사들여 그는 평생의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1986년, 그는 치나티 파운데이션을 설립합니다. 치나티는 단순한 미술관이 아닙니다. 작품을 잠깐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한 번 설치하면 영원히 그곳에 머무는 ‘영구 설치’ 공간이었습니다.
알루미늄 100개, 콘크리트 15개
치나티의 대표 작품은 단연 〈무제, 알루미늄 100점〉입니다. 두 동의 큰 격납고 안에 똑같은 크기의 알루미늄 상자 100개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햇빛이 들어올 때마다 달라지는 반짝임은 사막의 시간과 함께 작품을 완성합니다.
야외에는 〈무제, 콘크리트 15점〉이 기다립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 길게 놓인 콘크리트 구조물은 멀리서 보면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립니다. 바람, 풀, 그림자가 작품과 함께 움직이니, 자연이 매일 새롭게 작품을 완성하는 셈입니다.
건축과 생활까지 바꾼 예술
저드의 철학은 미술관을 넘어 건축과 생활로 확장됐습니다. 뉴욕 소호에 있는 101 스프링 스트리트 건물은 그가 직접 설계해 살던 집이자 전시장입니다. 가구, 작품, 빛이 어우러져 하나의 환경을 이루도록 배치했습니다.
말파에서도 그는 자신만의 집과 작업 공간인 라 만사나 데 치나티(The Block)를 만들었습니다. 저드는 이 부지가 도시 한 블록 크기였기에 “더 블록(The Block)”이라고 불렀고, 이후 인근 치나티 산맥의 이름을 따서 라 만사나 데 치나티(La Mansana de Chinati)라고 불렀습니다. 저드에게는 집조차 하나의 작품이었던 셈입니다.
오늘날 말파는 예술의 순례지가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이 사막 마을을 찾아와 저드의 작품과 함께, 치나티에 보존된 댄 플래빈, 존 체임벌린, 카를 안드레 등의 대형 작업을 마주합니다. 덕분에 한적한 마을이 세계적인 예술 도시로 변했습니다.
저드의 질문
도널드 저드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작품은 어디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그의 답은 분명했습니다. 작품은 스스로 존재해야 하고, 환경과 정확히 맞물려야 한다는 것. 그래서 오늘도 말파의 사막에 서 있는 알루미늄과 콘크리트는 변함없이 같은 자리를 지킵니다. 그것이 바로 도널드 저드가 남긴 가장 강렬한 유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