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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이 복잡한 그 남자-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피카소, 천재인가 괴물인가?

그림을 한 점 떠올려봅시다. 얼굴이 뒤틀리고, 눈과 코가 이상한 위치에 있습니다. 누군가는 “위대한 예술”이라 감탄하고, 누군가는 “이게 대체 뭐야?”라고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이 모든 논란의 중심에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바로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그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술의 판도를 뒤집은 혁명가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생활이 끊임없이 논란이 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진정한 천재일까요? 아니면 문제적 예술가였을까요?

20세기 미술계 최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젊은 시절 피카소

“나는 찾지 않는다, 나는 발견한다” – 피카소의 탄생과 혁신

1881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10대에 이미 완벽한 리얼리즘 회화를 구사했지만, 곧 전통적인 방식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피카소 10대 때 그린 그림들
피카소가 15살에 그린 그림

“나는 현실을 그대로 그리고 싶지 않다. 나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고 싶다.”

그리고 그는 예술을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피카소는 미술사의 판도를 바꾼 작품을 발표합니다.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기존의 원근법, 형태,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그림
이상하게 뒤틀린 여성들, 그리고 아프리카 원시 미술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표현
“이게 대체 뭐야?”라는 충격과 함께, 미술계의 규칙을 박살낸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그 시점(視點)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점입니다. 여러 시점에서 바라본 인물들은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른쪽에 있는 두 여성의 얼굴은 색도, 모양도 왜곡돼 있습니다. 원근법도 고려하지 않은 피카소 특유의 화법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아비뇽의 처녀들’은 그렇게 놀랄 만한 작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0세기 이 작품이 공개됐을 때 화가들과 대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피카소가 전통 회화의 원칙을 무시한 채 매우 혁신적인 화풍을 선보였기 때문이지요. 이 그림은 큐비즘(Cubism)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후 피카소는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모든 사물을 각지고 해체된 형태로 표현하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냅니다.

Les Demoiselles d'Avignon (Picasso) | Description & Facts | Britannica

〈게르니카〉 – 피카소, 시대의 증인이 되다

하지만 피카소는 단순한 미술 혁신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대의 고통을 작품으로 담아낸 예술가이기도 했습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을 고발하고 비판하기 위해 그린 작품입니다.

1937년, 스페인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Guernica)가 프랑코 정권에 의해 융단 폭격을 당합니다. 당시 스페인은 우파 프랑코 정권과 좌파 인민전선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프랑코 정권은 바스크 점령을 위해 이런 악마와 같은 일을 벌였습니다. 이때 1500명의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게르니카 폭격이 충격을 준 것은 민간인들에게 마저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피카소는 이 폭격에 큰 충격을 받았고 분노했습니다. 그 분노는 바로 그의 걸작〈게르니카>가 되었습니다.

흑백으로만 표현된 거대한 캔버스
공포에 질린 사람들,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는 말과 소들
전쟁의 참혹함을 기록한 미술사의 걸작

이 그림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선언이자 시대의 증언이었습니다.

피카소, ' 게르니카 '

천재인가 괴물인가? – 피카소의 논란과 그림자

하지만 피카소는 단순히 위대한 예술가로만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는 수많은 여성들과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논란들이 존재합니다.

“그는 여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소비했다.”
“그에게 여자는 뮤즈가 아니라, 도구였다.”

그의 애인과 부인들은 하나같이 피카소와의 관계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의 두 연인, 도라 마르(Dora Maar)와 프랑수아즈 질로(Françoise Gilot)는 피카소의 사랑이 집착과 통제의 형태를 띄었다고 폭로했습니다. 도라 마르는〈우는 여인(Weeping Woman)의 모델이었지만, 피카소의 가혹한 태도로 인해 결국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습니다.

(좌) 피카소와 도라 마르 (우) 우는 여인

프랑수아즈 질로는 그를 떠난 유일한 여성이었고, 그 때문에 피카소는 그녀를 철저히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질로는 이후 피카소에 대한 폭로글을 써 수백만부를 팔았고, 화가로 변신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여자는 두 가지 부류뿐이다. 신이거나, 걸레거나.”

이 발언은 오늘날까지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이원론적 여성숭배와 여성혐오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피카소는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였고, 평화 운동과 인권 운동에 적극적인 진보 사상가였습니다. 하지만 피카소가 만난 여자들 중 2명은 자살했고, 1명은 신경 쇠약에 걸렸습니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단순한 예술적 천재였을까요? 아니면, 그의 사상까지도 평가해야 하는 걸까요?

프랑수아즈 질로 : 네이버 블로그
프랑수아즈 질로

“미술의 신인가, 시대의 산물인가?”

피카소는 미술사의 절대적인 거장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현대 미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큐비즘의 창시자
전쟁을 고발한 화가
그러나 동시에, 여성들에게 상처를 남긴 인물

그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은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예술가의 삶까지 예술로 평가해야 하는가?”
“아니면, 작품과 인물은 분리해서 봐야 하는가?”

피카소 '키스'에 영감을 준 작품…위대한 작가를 만들어 낸 건? - 올댓아트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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