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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미술관 ⑤ 침묵의 철학, 대한민국 '사유원(Sayuwon)'

경북 군위의 깊은 산세 속에 자리 잡은 사유원(Sayuwon)은 인간이 자연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찾아가는 ‘사유(思惟)’의 장소입니다. 약 10만 평의 광활한 부지 위에 펼쳐진 이 수목원은 단순한 조경 공간을 넘어, 알바로 시자(Álvaro Siza), 승효상, 최욱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자연이라는 캔버스 위에 점을 찍듯 완성한 건축과 자연의 위대한 합주곡입니다.

피치바이피치 - [기차여행] 건축과 자연이 어우러진 사색의 숲, 군위 사유원 투어

나무를 향한 오랜 기다림과 사유의 시작

사유원의 탄생 배경에는 태창철강 유재성 회장의 30년에 걸친 집념과 안목이 서려 있습니다. 그는 일본으로 팔려 나갈 뻔한 수백 년 된 모과나무 300여 그루를 지켜내기 위해 이 땅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이곳이 화려한 관광지가 되기보다, 방문객들이 고독과 마주하며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 되길 원했습니다.

설립자의 이러한 철학은 ‘사유원’이라는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이곳은 인위적인 장식을 배제하고 자연의 시간과 건축의 공간이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상업적인 미술관이 지향하는 ‘관람’의 개념을 넘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걷는 철학’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모과나무 4그루로 시작한 사색의 공간, 대구 군위 사유원

[풍설기천년] 사유원의 심장, 모과정원의 대서사시

사유원의 모든 건축물은 사실 이 거대한 모과나무 정원,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람과 눈을 맞으며 몇 천 년을 지내왔는가’라는 뜻을 지닌 이 정원은 설립자가 30년 동안 전국을 돌며 수집하고 보살핀 300여 그루의 고령 모과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재성 회장이 모과나무에 이토록 천착한 이유는 그 나무가 지닌 ‘인고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습니다. 30여 년 전, 그는 일본의 조경업자들이 한국의 전역을 뒤져 수백 년 된 명품 모과나무들을 헐값에 사들여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민족의 숨결이 담긴 영험한 나무들이 타국으로 팔려 나가는 것에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사재를 털어 전국 각지의 고목들을 사들여 지켜내기 시작했습니다.

조경가 정영선은 이 나무들이 사유원의 험준한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하여, 마치 태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웅장한 경관을 완성했습니다. 가을이면 노랗게 익어가는 모과 향기가 계곡을 채우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가 무채색 건축물과 대비되며 동양적인 여백의 미를 극대화합니다.

모과길 | 사유원
모과나무 정원,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

알바로 시자와 승효상

사유원의 건축은 현대 건축의 신화적인 존재들과 함께했습니다. 포르투갈의 거장 알바로 시자(Álvaro Siza)는 그의 상징과도 같은 백색의 콘크리트와 빛의 변주를 이곳에 이식했습니다. 그가 설계한 ‘소요헌’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품기 위해 구상되었던 공간으로,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내부의 기하학적 벽면과 만나며 성스러운 침묵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공간보기<!-- --> | <!-- -->사유원
알바로 사자 <소요헌>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승효상은 사유원의 전체적인 기획과 더불어 ‘현암’, ‘명정’ 등 주요 공간을 설계했습니다. 그는 ‘빈자의 미학’이라는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건축물이 자연보다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사유를 돕는 도구가 되도록 했습니다. 특히 붉은 코르텐강으로 지어진 ‘명정(瞑庭)’은 좁고 깊은 통로를 지나 탁 트인 수평선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삶과 죽음 그리고 명상의 의미를 건축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Casamia
승효상 <명정>

물과 돌, 그리고 시간이 멈춘 자리

사유원의 모든 공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사색의 밀도를 유지합니다. 이곳은 소리 없이 흐르는 물과 단단한 바위, 그리고 바람의 통로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어, 방문객은 도시의 소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절대적인 정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최근 사유원은 전 세계 건축가들 사이에서 ‘가보고 싶은 현대적 정원’으로 꼽히며 그 위상이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미술관이라는 틀에 박힌 형식 없이도, 건축물이 배치된 방식과 자연을 다루는 태도만으로도 최고 수준의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대지 위에 쓰여진 이 거대한 철학책은 한 번의 방문으로는 다 읽어낼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복잡한 일상으로부터의 비움, <대구 군위 사유원 #2>

[Travel Info]

  • 위치: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치산효령로 1150
  • 참여 거장: 알바로 시자(건축), 승효상(건축), 최욱(건축), 정영선(조경) 등
  • 핵심 공간: 풍설기천년(모과정원), 소요헌(알바로 시자), 명정(승효상)
  • 팁: 사유원은 완전 예약제로 운영되며, 하루 입장 인원을 제한합니다. 모과나무의 수형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늦가을이나 초겨울의 방문을 적극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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