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미술관 ⑧ 산속 무릉도원, 일본 '미호 뮤지엄(Miho Museum)'
일본 시가현 시가라키의 험준한 산세 속, 안개에 싸인 숲길을 지나다 보면 비현실적인 풍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세계적인 건축 거장 I.M. 페이(I.M. Pei)가 설계한 미호 뮤지엄(Miho Museum)은 중국 진나라 시대의 시인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 속 무릉도원을 현대 건축으로 형상화한 공간입니다. 이곳은 단순히 유물을 전시하는 미술관을 넘어,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을 지상에 구현한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사건과도 같습니다.

고야마 미호코, 예술로 세상을 치유한 여성 리더
미호 뮤지엄의 설립자 고야마 미호코(Koyama Mihoko, 1910-2003)는 일본의 종교인이자 기업가, 그리고 당대 최고의 여성 컬렉터 중 한 명입니다. 그녀의 이력은 일본의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일본의 명문 지유가쿠엔(자유학원)에서 수학한 그녀는 “생활 속의 예술”과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교육 철학 아래 성장했습니다. 이는 훗날 그녀가 예술품을 수집하고 미술관을 세우는 데 근간이 되었습니다.

미호코는 1970년, 신흥 종교 단체인 신지슈메이카이(神慈秀明會)를 설립했습니다. 이 단체는 ‘예술과 자연 농법을 통해 인류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교리를 전파하며 일본 내외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확보했습니다. 그녀는 종교적 수행의 일환으로 최고의 예술품을 접하는 것이 인간의 품격을 높인다고 믿었으며, 신도들의 헌신과 재단의 자산 운영을 통해 세계 미술 시장에서 독보적인 컬렉션을 구축할 수 있는 재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수집한 동서양의 고대 유물들이 단순히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 안착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1990년 슈메이 문화재단(Shumei Culture Foundation)을 설립하고, 노장의 I.M. 페이에게 “현대의 무릉도원을 지어달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요청을 전달하며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슈메이 문화재단, “예술은 종교의 꽃”
미호 뮤지엄을 운영하는 슈메이 문화재단은 고야마 미호코의 철학을 계승하는 지적·문화적 중심지입니다. 재단은 “예술이야말로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여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보편적인 언어”라고 정의합니다.
재단은 단순히 유물을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 전 세계 고대 유적의 보존과 복원 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왔습니다. 미호 뮤지엄의 소장품들이 세계 유수의 박물관으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재단이 상업적 가치보다 역사적 진귀함과 예술적 순수성에 집중하여 수집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지금도 자연 농법 확산과 문화 예술 후원을 통해 사회 전반에 ‘정화(Purification)’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도화원으로 향하는 터널과 현수교
미호 뮤지엄의 가장 극적인 건축적 장치는 입구에서 미술관 본관까지 이어지는 여정입니다. 방문객은 먼저 은빛으로 빛나는 긴 스테인리스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터널은 빛을 은은하게 반사하며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선언합니다. 터널 끝에 다다르면 시야가 갑자기 트이며 깊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현수교가 나타나는데, 이는 무릉도원의 입구를 찾았던 어부의 경이로움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I.M. 페이는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에서 보여주었던 자신의 장기인 기하학적 유리 구조를 이곳에도 적용했습니다. 전통적인 일본 가옥의 지붕 선을 닮은 유리 지붕은 주변 산세와 부드러운 리듬을 형성하며, 내부로는 따스한 햇살을 끌어들입니다. 건축물 전체의 80% 이상이 지하에 매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전혀 답답하지 않은 이유는 이 정교한 유리 천장을 통해 자연광이 수직으로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금속과 유리라는 차가운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석회암(Limestone) 벽면의 부드러운 베이지 톤을 결합해 고전적인 우아함을 완성했습니다.

관별 컨셉과 대표 소장품
미호 뮤지엄은 크게 북관(North Wing)과 남관(South Wing)으로 나뉘며, 각기 다른 테마로 인류 문명의 궤적을 보여줍니다.
- 북관 – 일본 미술의 향연: 일본의 차(茶) 문화와 도자기, 불교 미술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설립자의 고향인 시가라키 지역의 고도자기 컬렉션과 화려한 에도 시대의 회화들이 주를 이룹니다. 일본 전통 가옥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에서 섬세한 공예의 정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 남관 – 세계 문명의 보고: 이집트, 서아시아, 그리스, 로마, 파키스탄, 중국 등 고대 실크로드를 따라 이어진 문명들의 걸작이 전시됩니다.
- 대표작: 간다라 석가모니 입상: 높이 2.5m에 달하는 이 거대한 불상은 현존하는 간다라 불상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완벽하며 예술적 완성도가 높기로 유명합니다.
- 대표작: 사산 왕조의 은제 호: 정교한 세공 기술이 돋보이는 이 유물은 고대 서아시아의 찬란한 금속 공예 수준을 증언합니다.
- 대표작: 이집트의 호루스 신상: 은과 금으로 장식된 매의 형상을 한 이 조각상은 미호 뮤지엄이 지닌 세계적 수준의 소장 가치를 보여줍니다.

자연이 완성하는 마지막 인테리어
미호 뮤지엄은 계절마다 전혀 다른 옷을 입습니다. 봄이면 터널 입구의 수많은 수양벚꽃이 분홍빛 안개를 이루어 진정한 도화원의 풍경을 연출하고, 가을이면 불타는 듯한 단풍이 유리 지붕 너머로 장관을 이룹니다. I.M. 페이는 “건축은 환경의 일부여야 한다”는 자신의 신조를 이 깊은 산속에서 완벽하게 증명해 냈습니다.
![시가] [Sakura Season Limited Kansai Shiga Cherry Blossom Viewing] Miho Museum & Mii-dera Temple & Lake Biwa Canal Cherry Blossom One-Day Tour - LIVE JAPAN (일본여행정보사이트)](https://res.klook.com/image/upload/activities/aribszxfvejxkk0rsu83.jpg)
미술관 내부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제공되는 식사 또한 설립자의 철학에 따라 농약과 비료를 사용하지 않은 자연 농법 식재료만을 사용합니다. 이곳에서 즐기는 소박한 오찬은 시각적인 감동을 미각으로 확장하며 진정한 의미의 휴식과 정화(Purification)를 완성합니다. 미호 뮤지엄은 도시의 소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자연과 예술이 주는 평온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이들에게 지상 최후의 낙원이 되어줄 것입니다.

[Travel Info]
- 위치: 300 Momodani, Shigaraki-cho, Koka-shi, Shiga 529-1814, Japan
- 건축: I.M. 페이 (I.M. Pei)
- 운영: 슈메이 문화재단 (Shumei Culture Foundation)
- 팁: 교토역에서 버스를 타고 약 50분 정도 소요됩니다. 벚꽃 시즌과 단풍 시즌에는 예약이 매우 치열하므로 반드시 미리 일정을 확인해야 합니다. 동절기에는 휴관하는 경우가 많으니 방문 전 웹사이트 확인은 필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