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예술 한조각

Art News

세계의 미술관 ⑪ 침묵과 사색, 미국 '글렌스톤 뮤지엄(Glenstone)'

미국 워싱턴 DC에서 차로 40분 거리, 메릴랜드주 포토맥의 완만한 구릉 지대를 달리다 보면 표지판조차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입구와 마주하게 됩니다. 230에이커(약 28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대지 위에 세워진 글렌스톤 뮤지엄(Glenstone)은 현대 건축과 조경, 그리고 현대 미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균형점을 보여주는 프라이빗 미술관입니다. 이곳은 방문객의 수를 엄격히 제한하고 ‘침묵’을 권장하며, 오직 예술과 자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을 선사합니다.

Tour the New $200 Million Expansion of One of America's Most Important—and  Unknown—Museums | Architectural Digest

비즈니스 거물에서 예술의 수호자로

글렌스톤은 억만장자 사업가 미첼 레일스(Mitchell Rales)와 그의 아내이자 큐레이터인 에밀리 웨이 레일스(Emily Wei Rales)의 집념과 철학이 빚어낸 결과물입니다. 미첼 레일스는 형 스티븐 레일스와 함께 글로벌 과학 기술 및 공업 그룹인 ‘다나허 코퍼레이션(Danaher Corporation)’을 일구어낸 자산가입니다. 다나허는 수많은 기업을 인수합병하여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전략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미첼은 이 부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트 컬렉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미첼은 단순히 유명세를 쫓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지닌 ‘정신적 울림’에 집중합니다. 그는 큐레이터인 아내 에밀리와 함께 수십 년간 옥션보다는 작가와의 직접적인 교감, 혹은 작품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의 맥락을 중시하며 컬렉션을 모았습니다. 특히 한 작가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심도 깊은 컬렉팅 방식을 택해, 해당 작가의 예술적 진화를 한 공간에서 목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특징입니다.

What the Divorce of Glenstone's Billionaire Founders Means for the Art  Museum
미첼 레일스(Mitchell Rales)와 그의 아내이자 큐레이터인 에밀리 웨이 레일스(Emily Wei Rales)

1990년대 중반, 미첼은 헬기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후 인생의 가치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걸작들이 창고에 머물기보다 자연의 빛 아래에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에 2006년 자신의 저택 부지에 글렌스톤의 첫 번째 관을 열었고, 2018년 대대적인 확장을 통해 현재의 거대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레일스 부부는 상업적인 흥행이나 화려한 마케팅 대신 ‘느린 관람’을 지향합니다. 미술관은 무료로 운영되지만 하루 입장 인원을 약 400~500명 내외로 엄격히 제한하는 철저한 예약제를 고수합니다.작품 설명 카드 대신 도슨트와의 대화를 장려합니다. 이는 예술이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영적인 성찰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굳은 신념을 반영합니다.

Glenstone Museum | Thomas Phifer and Partners

대지 아래로 스며든 ‘파빌리온’

2018년 완공된 ‘파빌리온(The Pavilions)’은 건축가 토마스 파이저(Thomas Phifer)가 설계한 이곳의 상징입니다. 파이저는 리처드 마이어와 스티븐 홀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빛의 정교한 통제와 미니멀한 물성을 다루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수천 개의 밝은 회색 콘크리트 블록이 쌓인 외관은 마치 거대한 미니멀리즘 조각처럼 보입니다. 총 11개의 각각의 전시실은 중앙의 ‘물 정원(Water Court)’을 둘러싸고 독립된 파빌리온 형태로 존재하며, 자연광이 천장을 통해 수직으로 쏟아져 들어오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었습니다.

갤러리(The Gallery)는 파빌리온이 세워지기 전, 2006년 글렌스톤의 시작을 알린 건물입니다. 건축가 찰스 과스메이(Charles Gwathmey)가 설계한 이 건물은 산등성이를 따라 자리 잡고 있으며, 보다 고전적인 화이트 큐브의 우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는 특별 기획 전시나 초기 컬렉션 위주로 운영됩니다.

야생의 숨결과 예술의 조우

글렌스톤의 진정한 백미는 조경가 피터 워커(Peter Walker)와 그웬 팔코너(Gwen Falconer)가 완성한 압도적인 스케일의 정원입니다. 이들은 원래 골프장과 목초지였던 땅에 6,000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고, 토착 자생 식물들을 식재하여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의 풍경을 복원했습니다. 계절에 따라 빛깔을 바꾸는 억새와 들꽃 사이로 난 산책로는 관람객을 명상으로 안내합니다.

An Exclusive First Look at the Glenstone Museum's Monumental Expansion -  Galerie Magazine

광활한 들판 곳곳에는 거대 조각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프 쿤스의 꽃 덮인 거대 조각 ‘스플릿 록커(Split-Rocker)’는 계절마다 다른 꽃을 피우며 정원의 주인공이 되고, 리처드 세라의 거대한 강철 조각들은 능선의 곡선과 대조를 이루며 웅장한 무게감을 선사합니다. 건축물 중앙에 위치한 물 정원에는 수련이 떠 있고, 수면 위로 구름과 하늘이 비칩니다. 파빌리온 내부에서 이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사라지는 듯한 신비로운 일체감을 느끼게 됩니다.

Glenstone Museum: Where Art and Nature Merge in Harmony | BaldHiker

시간을 견디는 마스터피스

글렌스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사이 톰블리, 루이스 부르주아 등 거장들의 작품이 각각의 전용 파빌리온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명상적인 색면 추상이 쏟아지는 빛과 만나며 관람객을 압도합니다. 오직 작품과 관람객의 호흡만이 존재하는 정적의 공간입니다.
  • 사이 톰블리(Cy Twombly): 자유로운 필치와 문자성이 돋보이는 그의 대작들이 높은 천고와 자연광 아래에서 리드미컬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그녀의 상징적인 조각들이 건축적 프레임 속에서 삶과 죽음, 상처에 대한 심오한 대화를 건넵니다.
  • 찰스 레이(Charles Ray): 극사실주의적인 조각들이 파빌리온의 기하학적 공간과 만나 비현실적인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깊이 있게 조명하기 위해 특정 공간을 오직 한 명의 예술가에게만 할애하는 방식은 글렌스톤만이 가진 사치스러운 여유입니다. 이곳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예술과 자연이 결합했을 때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깊이 정화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Monumental Richard Serra sculpture, and a custom-designed pavilion to house  it, unveiled at Glenstone - The Art Newspaper - International art news and  events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