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미술관 ⑬붉은 벽돌의 서사시: 모로코 '이브 생 로랑 뮤지엄(mYSLm)'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모로코 마라케시. ‘붉은 도시’라는 별칭답게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 이 도시의 한복판에는 현대 패션사의 거장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의 영혼을 기리는 특별한 성지가 있습니다. 2017년 문을 연 이브 생 로랑 뮤지엄(mYSLm)은 브랜드 의상 전시관을 넘어, 한 천재 디자이너가 평생을 바쳐 탐구했던 색채와 형태, 그리고 그가 안식처로 삼았던 마라케시의 풍토가 건축으로 치환된 예술적 결정체입니다.

이브 생 로랑의 ‘진정한 고향’
프랑스 출신의 이브 생 로랑에게 마라케시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1966년 파트너인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é)와 함께 마라케시을 처음 방문한 순간, 이곳의 강렬한 빛과 원색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마라케시를 만나기 전까지 나의 세계는 흑백이었다”라고 회상할 만큼, 그는 마라케시의 거리와 정원에서 쏟아지는 분홍, 노랑, 파랑의 향연을 통해 디자인적 영감을 완전히 재정립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컬러 팔레트와 이국적인 실루엣은 대부분 이곳에서의 사색을 통해 탄생했습니다. 생로랑은 파리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극심한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그는 이곳을 찾았습니다. 마라케시는 그에게 창작의 고통을 치유해 주는 안식처이자, 동시에 가장 대담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
이브 생 로랑의 천재성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평생 동반자이자 사업적 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제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958년, 당시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21세의 이브 생 로랑과 야심 찬 예술 기획자였던 피에르 베르제는 운명처럼 만났습니다. 베르제는 단숨에 생 로랑의 천재성을 알아봤고, 이후 두 사람은 연인이자 가장 강력한 비즈니스 동맹이 되었습니다. 베르제는 단순히 경영만을 맡은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 로랑이 오직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모든 현실적인 장애물을 제거해 주는 ‘철갑 방패’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그는 1961년 ‘YSL’ 브랜드를 설립하여 오뜨 꾸뛰르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생 로랑의 불안한 정서를 지탱하며 그를 패션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만든 전략가였습니다.

이 미술관은 2008년 생 로랑이 세상을 떠난 후, 베르제가 추진한 마지막 거대 프로젝트였습니다. 베르제는 생 로랑의 방대한 아카이브를 보존하고,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마라케시의 흙 위에 그를 위한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그들의 사랑과 예술적 유산을 완결지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베르제는 미술관 개관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나, 두 사람은 이제 마라케시의 붉은 땅 아래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직물처럼 짠 테라코타 미학, 스튜디오 KO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맡은 건축 사무소는 프랑스의 스튜디오 KO(Studio KO)입니다. 칼 푸르니에(Karl Fournier)와 올리비에 마르티(Olivier Marty)가 이끄는 이들은 이브 생 로랑의 디자인 철학을 건축 언어로 번역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튜디오 KO는 세밀한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지역의 전통 소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팀입니다. 그들은 화려한 장식보다는 미니멀하면서도 촉각적인 질감을 강조하는 설계를 지향합니다.

미술관 외벽은 마라케시의 붉은 흙으로 만든 테라코타 벽돌로 덮여 있습니다. 이 벽돌들은 격자무늬로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이브 생 로랑이 즐겨 사용했던 트위드 원단의 조직이나 레이스의 섬세한 패턴을 연상시킵니다. 부드러운 곡선과 직선이 교차하는 건물 외관은 생 로랑의 상징적인 ‘르 스모킹(Le Smoking)’ 수트처럼 절제된 우아함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뿜어냅니다.

오뜨 꾸뛰르의 정수를 경험하다
미술관 내부는 외부의 거친 질감과 대조적으로 매끄럽고 고급스러운 마감으로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 상설 전시장: 생 로랑의 가장 대표적인 의상 50벌이 드라마틱한 조명 아래 전시되어 있습니다. 의상들은 단순한 마네킹 전시를 넘어, 소리(음악)와 영상이 결합된 연출을 통해 패션쇼의 런웨이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 피에르 베르제 라이브러리: 약 6,000권 이상의 패션, 식물학, 마라케시 역사 관련 서적을 소장한 이 도서관은 생 로랑의 지적 호기심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 카트린 드뇌브 강당: 다양한 컨퍼런스와 공연이 열리는 이 강당은 생 로랑의 뮤즈였던 배우 카트린 드뇌브의 이름을 땄으며, 완벽한 음향 시스템을 자랑합니다.


패션과 지역 사회의 공생
이브 생 로랑 뮤지엄 마라케시는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은 지역의 장인들과 협업하고 모로코의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합니다. 지역에서 생산된 재료를 사용하여 탄소 발자국을 줄이고, 마라케시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세계에 알리는 일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럭셔리란 화려한 보석만이 아니라, 한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얼마나 존중하고 우아하게 표현하는가에 있다는 사실을 이 미술관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브 생 로랑 뮤지엄은 패션이 어떻게 영원한 건축으로 기록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입니다. 마라케시의 붉은 벽돌 사이로 비치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거장이 사랑한 그 색채의 향연 속으로 빠져보시길 권합니다.

[Travel Info]
- 위치: Rue Yves St Laurent, Marrakesh 40000, Morocco
- 건축: 스튜디오 KO (Studio KO)
- 특징: 이브 생 로랑의 파트너 피에르 베르제가 설립. 마라케시의 붉은 테라코타 벽돌이 특징.
- 팁: 미술관 바로 옆에는 생 로랑과 베르제가 직접 가꿨던 ‘마조렐 정원(Jardin Majorelle)’이 있습니다. 선명한 파란색(마조렐 블루) 건물이 돋보이는 이 정원을 함께 관람해야 비로소 생 로랑의 마라케시 세계가 완성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