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부를 이긴다-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남루한 옷차림에 긴 턱수염을 휘날리며 고개를 꼿꼿이 든 위풍당당한 남자가 보입니다. 그 앞에 두 명의 신사가 서 있습니다. 초록색 자켓의 남자는 두 팔을 활짝 펴서 반기는 것 같고, 그 뒤의 남자는 모자를 벗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습니다다. 대체 이 세 명의 남자는 누구일까요?
이 그림은 바록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입니다. 즉 그림 속 오른쪽 남성이 바로 그림을 그린 화가 쿠르베입니다.
그림 속 쿠르베를 봅시다. 짝다리를 하고 턱을 든 채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며 산책 중에 만난 후원자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인사받고 있습니다.
제목은 평범했으나 부제는 기가 막힙니다. ‘부제: 천재 앞에 경의를 표하는 부(富)’라니! 쿠르베는 그런 화가였습니다. 귀족의 눈 밖에 나면 밥줄이 끊길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락한 화실이 아닌 배낭에 이젤과 화구를 가득 넣고 흙먼지 폴폴 날 것 같은 낡은 신발을 신고 거처를 옮겨 다니며 후원자가 원하는 그림보다는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내가 여는 셀프 전시
쿠르베는 1855년엔 ‘화가의 아틀리에’란 작품으로 또 한번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이 작품의 전시를 거부 당했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대외적으로 과시를 하는 만국박람회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사실적이고 성스럽지 않은 그림이였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크기가 가로 6m, 세로 3m에 달하는 대작인데요, 거절의 사유 또한 경건한 역사화도 아닌데 너무 크게 그렸다는 거였죠.
하지만 쿠르베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시장 근처에 직접 임시 공간을 만들어 ‘리얼리즘(Realism·사실주의) 전시관’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포함해 40여 점의 그림을 전시했죠. 이를 통해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또한 자신의 전시가 만국박람회와 같은 수준임을 보여주기 위해 만국박람회와 마찬가지로 1프랑의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무참했고, 쿠르베는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회화는 대중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의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역사화, 종교화, 초상화가 아니어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쿠르베가 저항한지 12년 이후, 또다시 열린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마네가 개인전을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안현배의 그림으로 보는 인류학] 쿠르베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화가의 아틀리에' - 스포츠경향](https://images.khan.co.kr/article/2017/12/30/l_2017121802000833400172511.jpg)
쿠르베, 아름다움’의 기준을 박살내다
쿠르베는 19세기 미술계를 지배했던 낭만주의적 환상과 신화적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날것 그대로의 현실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당시 미술계에 충격을 안겼습니다.
- ‘오르낭의 장례식(1849–50)’ – 평범한 시골 장례식을 웅장한 크기로 그려, 신화적 주제가 아니면 대형 캔버스에 걸맞지 않는다는 당시 관습을 박살냈습니다.
- ‘돌깨는 사람들(1849)’ – 노동자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며, 가난과 고된 노동의 현실을 미화 없이 드러냈습니다.
- ‘세상의 기원(1866)’ – 여성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지금도 논란의 중심에 있으며, 당시에는 스캔들 그 자체였습니다.
쿠르베의 작품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기에, 대중과 평론가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에게 붙은 ‘사실주의의 아버지’라는 칭호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쿠르베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나?
쿠르베의 혁명적인 회화 방식은 19세기 미술계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그를 “천박하고 조잡한 화가”라고 비난했으며, 상류층 고객들은 그의 그림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의 시초로 평가받으며 예술계에서 재조명되었습니다. 특히 인상주의와 사실주의를 넘어, 현대 미술 전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지만, 그의 외모와 자화상 사이의 차이는 여전히 흥미로운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