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중력에 맞서는 –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쇳덩이 하나가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까?
리처드 세라는 이 질문에 온몸으로 답했습니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맞붙어 싸우는 것임을 증명한 인물. 그의 인생은 철처럼 무겁고, 그의 작품은 무심한 듯 생명력을 터뜨렸습니다.
쇠붙이와 함께 태어난 남자
193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는 어린 시절부터 ‘철’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였고, 세라는 배를 만드는 거대한 철판과 용접 불꽃을 보며 성장했습니다. 4살이 되는 생일날에 아버지를 따라 거대한 유조선 진수식을 본 세라는 이 기억이 자신의 예술세계의 원천임을 밝혔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나는 금속이 가진 힘을, 산업이 가진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형태는 과정에서 태어난다
리처드 세라는 미국 UC버클리 대학과 예일대학에서 문학과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헨리 무어나 피카소의 조각을 동경했지만, 점점 기존 미술의 틀을 부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언합니다.
“나는 형태를 미리 설계하지 않는다. 재료가 요구하는 대로, 공간이 이끄는 대로, 몸으로 싸우며 만들어간다.”
1970년대 초, 세라는 재료 자체에 집중하는 미니멀리즘과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 운동의 선두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미니멀리스트를 넘어, 물리적 중력, 공간, 시간과의 긴장 속에서 살아 숨 쉬었습니다.

쇳덩어리가 춤추는 순간 — 대표작들
1. ‘기울어진 호 (Tilted Arc), 1981′
미국 뉴욕 연방 플라자에 설치된 이 거대한 철판 조형물은 공공 미술의 의미를 근본부터 흔든 작품이었습니다. 길이 36미터, 높이 3.5미터의 거대한 부식된 철판이 광장을 가로막으며 세워졌습니다. 그야말로 광장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기울어진 담장”이었습니다. 시민들은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기울어진 호’가 광장에 나타나자 직장인들과 시민들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하루아침에 두동강으로 절단이 된 광장으로 보행동선이 바뀌면서 매우 불편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벤치같은 쉼터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뜻한 봄날 샌드위치 점심 먹을 장소도 마련해 주지 못했고요. 이렇게 되자 민원이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철거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 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라는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 연방청사 광장을 가로지르는 강철벽이 통행과 시야의 불편함을 가져오게 해서 광장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자신의 움직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장애물을 중심으로 그 장소와 자신의 움직임을 다시 살펴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 광장을 두 개의 다른 지역으로 구분해 완전히 새로운 두 공간의 느낌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 다. 작품은 분수가 있는 넓은 공간과 건물과 가까운 좁은 공간으로 광장을 두 부분으로 나눴다. 작가는 이 두 공간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하길 원했습니다.
- 우리를 억압하는 권력을 경험하길 원했습니다. 이 세 번째 의도가 이 맞춤형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죠. 강철장벽을 그곳에 세워 놓음으로써 시야를 방해하고 움직임을 막는 경험과 바로 앞에 있는 연방청사(정부)가 지닌 ‘권력의 힘’을 연결하려고 했습니다. 정부의 건물을 보았을 때 받는 억압적인 느낌, 마치 정부라는 권력의 힘이 개인을 억누르는 느낌을 느끼길 원했던 것입니다.

연방 조달청은 세라에게 해결책을 요구했으나, 특정부지에 설치한 site-specific 작품은 옮기면 작품을 아예 없애는 것과 같다고 민원의 내용을 무시했습니다. 오랜 시간 논쟁이 계속되면서 법원은 연방정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수년동안의 법쟁분쟁이 끝나자, 1989년 작품은 덩어리로 분리하여 시청 창고로 향하게 됩니다.
‘Tilted Arc’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공공미술의 자유와 검열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쟁입니다.
![미술이야기] 모두를 위한 미술은 가능할까? 공공미술과 공공성 - 오픈갤러리](https://og-data.s3.amazonaws.com/media/artstory/post_image/63/6.jpg)
2. ‘시간의 문제 (The Matter of Time), 2005′
세라의 작품 세계를 집약해 보여주는 ‘시간의 문제’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최대 규모 주 전시장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작품입니다. 길이 130미터 너비 30미터에 달하는 이 전시장은 차라리 운동장이라고 하는 게 더 알맞아 보입니다. 세라는 여기에 부식 철판으로 만든 ‘조각’ 여덟 점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문제’를 설치했는데, 시시때때 작품을 교체하는 이 미술관에서 ‘시간의 문제’가 유일한 영구 전시품입니다. 사실 전체 무게가 1000톤 이상이니 이들을 다른 데로 옮길 수도 없죠.
각각의 작품은 어마어마한 철판의 크기와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치 종이를 잘라서 돌돌 말았다가 이리저리 세워둔 듯, 부드럽게 휘어진 곡면과 불규칙하게 기울어진 나선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관람객들은 작품들을 하나씩 거쳐가면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이 갑작스레 나타나는 길거나 짧은 통로, 넓거나 좁은 틈, 고압적으로 높은 벽과 쓰러질 듯 위태로운 철판을 거쳐 기나긴 전시장을 빠져나가야 합니다다. 관람객은 이 부정형의 공간을 걸으며 오롯이 스스로의 움직임과 감각, 흐르는 시간을 느낄 뿐입니다.
세라는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설치는 단순한 조각이 아닌 ‘공간 조각’, 즉 경험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3. ‘동-서/서-동 (East-West/West-East), 2014′
카타르 사막 한복판에 세운 이 작품은, 4개의 거대한 철판이 1km에 걸쳐 서 있는 형태입니다. 사막의 지형을 고려하여 세우면서 강판의 꼭대기는 네 개가 모두 해수면에서 같은 고도에 있게 설계하였습니다.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철판은 수천 년의 시간과 인간의 흔적을 상징합니다.
세라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직접 수개월 동안 카타르 사막을 걸었고, 철판은 이 장소의 바람, 빛, 지형에 완벽하게 응답하도록 고민하였습니다. 광활한 사막의 무공간 no space 에서 4개의 강판을 세우면서 하나의 공간 space 이 형성된 것이죠. 공간을 가늠할 하나의 사막 이곳에, 이 작품으로 인해 공간에 기준이 형성됐습니다. 동과 서를 나누는 이 4개의 기둥으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사막의 새로운 풍경이 조성된 것입니다.

철학: 조각은 ‘존재’ 그 자체다
리처드 세라에게 조각이란 시간, 무게, 중력, 공간의 상호작용입니다. 그는 조각을 통해 공간을 ‘재편’하고, 관객을 ‘집어삼킵니다’.
“나는 철을 통해, 세상의 무게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세상의 균형을 시험하고 싶었다.”
그의 거대한 철판 앞에 서면, 관객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이게 됩니다. 압도당하고, 길을 잃고, 철판이 존재하는 이 공간에 대해 ‘몸’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세라의 조각입니다.
‘기괴하다’, ‘위협적이다’, ‘공공의 미를 해친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논란은 오히려 세라를 ‘살아 있는 전설’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예쁜 조각을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라는 공간과 몸, 사회를 뒤흔들어 놓고, 관객에게 불편함과 충격을 던지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리처드 세라
- 출생 : 1938년 11월 2일
- 사망 : 2024년 3월 2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