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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와 마티스: 20세기 미술계 라이벌전

1906년 파리. 예술의 수도에서 두 명의 화가가 서로를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앙리 마티스,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 이들은 서로를 철저히 경쟁자이자 동료로 인식하며 미술사에서 가장 치열한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냈습니다.


마티스, 야수파를 만든 ‘색채의 혁신가’

마티스는 1905년 살롱 도톤 전시회에서 전통을 깨뜨리는 강렬한 색채 실험으로 ‘야수파(Fauvism)’를 탄생시켰습니다. “미술계의 야수들”이라 불릴 정도로 충격적인 원색과 거친 붓질이 특징이었죠. 대표작 ‘삶의 기쁨(Le Bonheur de Vivre)’은 당시 미술 비평가들에게 “비이성적이고 과격하다”는 혹평을 들었지만, 후에는 색채의 감각적 힘을 예술로 확립한 작품으로 재평가됩니다. 마티스는 “색은 내 무기”라고 선언할 정도로 색채 중심의 회화를 밀어붙였습니다.

Sketch for "Le Bonheur de vivre" ("The Joy of Life"), 1905-1906 by Henri  Matisse - Paper Print - SFMOMA Custom Prints - Custom Prints and Framing  From the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

피카소, 입체주의로 맞선 스페인 출신 천재

피카소는 마티스보다 젊었지만 이미 파리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였습니다. 마티스의 색채 실험에 자극받은 그는 형태 해체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1907년, 충격적인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을 공개합니다. 이는 기존 구상화 개념을 깨고 형태를 분해해 재구성한 입체주의(Cubism)의 시작점이었죠. 미술계는 또다시 경악합니다.

피카소는 이후 브라크와 함께 입체주의를 구체화하며 회화뿐 아니라 조각, 판화, 도자기까지 손을 뻗으며 미술 장르 자체를 확장해 나갑니다. 마티스가 색을 선택했다면, 피카소는 형태와 구조를 해체해 미술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Les Demoiselles d'Avignon - Wikipedia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서로를 견제하며 작업실에 걸린 ‘경쟁자의 그림’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절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철저히 의식했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의 작업실 벽에 마티스의 작품을 걸어두며 스스로에게 자극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티스 역시 피카소의 새 작업이 나올 때마다 강한 경계심을 보였죠.

피카소는 말합니다.
“마티스가 죽어야 내가 쉴 수 있다.”
이 발언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사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솔직한 말로 평가됩니다.

마티스는 1954년 암 투병 중에도 ‘종이 오리기(collage)’ 작업을 통해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았습니다. 병상에서 종이를 자르고 붙이며 만든 ‘블루 누드’ 시리즈는 마지막까지 색채에 집착한 그의 예술 인생을 보여줍니다. 피카소는 마티스 사망 후에도 197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생애 동안 약 13만 점을 남겼으며, 이는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방대한 작업량으로 기록됩니다.

Artist Rivalry: Matisse and Picasso • Connect With Art
(좌) 마티스 (우)피카소

승자는 없었다, 미술사 자체가 두 사람의 전장

오늘날 미술계는 “색채의 마티스”“형태의 피카소” 둘 모두를 현대미술의 주역으로 인정합니다. 마티스는 색채의 회화적 가능성을 끝까지 확장했고, 피카소는 형태와 구조를 해체하며 예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두 사람의 대결은 단순한 경쟁이 아닌, 미술 자체를 새롭게 만든 ‘창조적 충돌’이었습니다. 서로를 넘어서기 위해 싸운 결과, 미술사 전체가 그 싸움의 산물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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