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썹-앝

당신을 위한 예술 한조각

Artist

빛과 자연의 조각가-제임스 터렐 (James Turrell)

“나는 빛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빛을 ‘보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 한마디로도 충분합니다. 그는 ‘빛’을 조형하고, ‘하늘’을 조각하며, 당신의 시각을 해체해버리는 감각의 해커, 우주의 설계자, 그리고 빛의 예언자, 바로 ‘제임스 터렐’입니다.

구하우스

하늘을 건축한 남자, 로덴 크레이터

미국 애리조나 사막 한복판, 인적도 없는 붉은 대지 위. 그곳에 있는 지름 약 3.2km, 40만 년 전 분화한 휴화산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은 로덴 크레이터(Roden Crater). 제임스 터렐은 이곳을 ‘우주로 들어가는 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1977년, 그는 이 분화구를 사들입니다. 그는 ‘하늘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 거대한 자연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삼은 겁니다.

그는 분화구 안에 망원경 없이도 별을 볼 수 있는 돔형 공간, 빛의 터널,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따라 정렬된 관측구 등을 설치해 ‘우주의 시간’을 느끼게 합니다. 이는 단순한 설치미술을 넘어, 고대 마야의 천문학과 현대 과학, 종교적 명상까지 결합된,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예술 프로젝트입니다.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며, 터렐은 “이 프로젝트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그 속도조차 예술의 일부로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James Turrell — Roden Crater – TLmagazine

로덴 크레이터는 1997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초대형 프로젝트입니다. 이곳에 설치된 육안 관측 천문대는 천체의 빛을 경험하고 관조하기에 최적의 형태로 설계되었습니다. 터렐은 터널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정렬을 계산하기 위해 천문학자와 천체물리학자들과 협업했습니다.

이 작품은 18.61년마다 발생하는 주요 달 정지 현상(Major Lunar Stopstill) 동안 가장 완벽하게 정렬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달이 머리 위를 지날 때, 달빛이 터널을 따라 흘러내려 지름 6피트(약 1.8미터)의 렌즈를 통해 굴절되어 아래 8피트(약 2.4미터) 높이의 흰 대리석 원반에 달의 상이 투사됩니다. 다음 달 정지 현상은 2025년 4월에 발생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The Roden Crater Telescope | Portal to a magical overnight a… | Flickr

빛으로 만든 건축, 공간으로 빚은 감각

터렐의 예술은 화려한 물감도, 조각도, 캔버스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 도구는 단 하나. 입니다. 그는 빛을 ‘건축 재료’로 사용합니다.

그의 대표 시리즈인 “Skyspace”에서는 천장에 네모난 구멍이 뚫린 방을 통해 하늘을 감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하늘이 마치 ‘화면’처럼 평면으로 보이고, 시간이 지나며 하늘이 보라색에서 주황색으로, 다시 새파란 남색으로 바뀝니다. 이는 자연광과 인공조명을 정교하게 조합해, 관람자의 뇌가 시각적 환영을 겪도록 설계된 감각의 연금술입니다.

터렐은 말합니다. “내 작품은 ‘보는 것’에 대한 믿음을 해체하는 데 있다.”

Wonder and Awe in a James Turrell Skyspace – Common Edge

눈이 아닌 ‘감각’으로 본다

제임스 터렐은 독실한 퀘이커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침묵 속에서 ‘내면의 빛’을 찾는 그들의 수행 방식은 그의 작품 철학에 강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명상’의 체험장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깨닫게 되죠.

터렐의 작품은 때로는 극도로 어둡거나, 혹은 압도적으로 밝습니다. 심지어 어떤 방에서는 10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당신은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눈으로 본다는 것이, 뇌가 받아들이는 시각적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조작 가능하고, 얼마나 주관적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뮤지엄 산 Museum SAN (한솔문화재단)
뮤지엄 산 <Into The Light>

한국과의 운명적 인연

그의 작품 세계는 한국과도 깊이 연결돼 있습니다.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뮤지엄 SAN에는 제임스 터렐의 전용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Ganzfeld’, ‘Wedgework’, ‘Skyspace’ 등 대표작을 통해 그의 ‘빛의 세계’를 직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터렐의 부인이 한국인이기도 합니다. 제임스 터렐이 두 번 이혼 후 한국인 아티스트 이경림과 결혼했습니다. 1957년 서울생 이경림 작가는 197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화가입니다.

터렐은 2023년 전남 신안에서 열린 ‘대한민국 문화의 달’ 행사에도 초청되어, 한국의 자연과 문화가 그의 예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강연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빛, 특히 해와 달의 움직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밝히며, “언젠가 한국에도 로덴 크레이터 같은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BFA: Images Matter
제임스 터렐과 이경미 작가

감각을 섞는 예술가-제임스 터렐

그의 작품은 단지 설치미술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건 공간 디자인이자, 과학이자, 철학이며, 일종의 종교적 체험입니다. 당신이 조용히 그의 작품 앞에 앉아 있을 때,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라는 질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떠오른 순간, 터렐의 예술은 당신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남자, 제임스 터렐은 어쩌면 예술가가 아니라, 현대인의 감각을 다시 조율하는 빛의 치료자일지도 모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