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빛으로 물든 추잡함-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세상에서 가장 검은색이라고 불리는 ‘반타 블랙’

물체가 검게 보이는 이유가 모든 빛을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즉, 빛을 많이 흡수할수록 검게 보이는것이죠. 반타 블랙이라고 불리는 이 안료는 흡수율이 무려 99.965%나 되고, 가시광선뿐만 아니라 적외선 영역까지 흡수합니다. 이렇게 반타블랙은 모든 빛을 흡수하여 육안으로 음영을 확인할 수 없어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모양이 울퉁불퉁 하더라도 정면에서 보면 완전한 평면으로 인식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타블랙은 어디에 쓰일까요?

첫 번째는 우리가 별을 볼 때 사용하는 천체 망원경입니다. 별을 관측할 때 주변 빛의 난반사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오늘날 국내 망원경의 빛 반사율은 7%, 미국 나사 망원경은 1%수준이지만 망원경 내부에 반타블랙을 칠하면 반사율이 0.04%로 줄어들기 때문에 우주 관측에도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인공위성입니다. 인공위성을 반타블랙으로 도색하면 어마어마한 흡수력 덕분에 적의 눈에 띄지 않아 완벽한 첩보위성 등 군사 분야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영국 제조회사인 Surrey Nano System에서 탄소 나노튜브 공학을 이용해 군사, 우주항공에 사용을 목적으로 하는 ‘반타 블랙’을 개발하였습니다. 이 제작 과정에서 아니쉬 카푸어는 투자에 참여하게 됩니다. 개발연구에 거액의 돈을 투자하며, 전 세계 예술가 중에서 본인 단 한명만 사용할 수 있도록 독점 계약을 맺습니다.

전세계 예술가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에서 아니쉬 카푸어의 이런 독점행위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카푸어는 ‘정당하게 계약해 상품 독점권을 얻었으니, 자기 행동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너만 쓸수 없는 분홍색! – 스튜어트 셈플

영국 예술가 스튜어트 셈플(Stuart Semple)은 독특한 방법으로 아니쉬 카푸어를 조롱했습니다. 그는 전세계 모두가 쓸수 있지만, 단 한명 아니쉬 카푸어만 못 쓰는 색을 개발했습니다. 스튜어트 셈플은 ‘세상에서 가장 분홍색 다운 분홍(World’s pinkest pink)’을 개발하고, 이 안료를 판매하는 사이트에는 아니쉬 카푸어 본인과, 아니쉬 카푸어의 관계자들은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이 명시하였습니다. 실제로 해당 안료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아니쉬 카푸어가 아니며, 그의 대리인이 아님을 증명해야 합니다.

스튜어트 셈플은 이 프로젝트 전체를 예술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단 한사람만을 위한 검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가질 수 있는 분홍색이 생긴다면 어떨까요? 이 분홍색은 특권과 엘리트주의, 접근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술적 발전을 돈으로 독점한 예술가에 대한 보복을, 현대 예술로 승화한 스투어트 셈플. 그러나 이에 대한 아니쉬 카푸어의 반응은 보다 유치했습니다. 셈플이 만들 분홍색 안료를 구매해 (어떤 방법으로 구매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본인이 아님을 증명했겠죠?) 가운뎃 손가락에 찍어 “Up Yours #Pink” 라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이죠. 그러나 여전히 반타 블랙은 예술가 중에서 아니쉬 카푸어만 사용 가능한 컬러입니다.

더 검은 검은색-리뎀션 오브 베니티

그러나 MIT 연구진이 2019년 ‘리뎀션 오브 베니티’(Redemption of Vanity)라는 반타블랙보다 7배 흡수율 높은 검은색을 개발하였습니다. 또한 MIT 연구진은 자신들이 개발한 물질을 비상업적인 활동에 한해서 예술가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반타 블랙을 개발한 영국 업체 서리 나노시스템스가 거액의 돈을 받고 아니쉬 카푸어에게만 독점권을 준 것과 대조되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