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예술, 삶과 죽음-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912년 4월, 북대서양의 얼음 바다에 거대한 배가 가라앉았습니다. 타이타닉 침몰 사고는 수많은 생명을 삼켰고, 그중에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 벤저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 그는 미국의 구겐하임 재벌 가문의 일원이자, “신사답게 죽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인물이었죠. 구명정 대신 정장 차림으로 선실에 남아 최후를 맞이한 그의 품격은, 훗날 딸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의 인생을 규정했습니다. 21살의 어린 나이에 막대한 부를 물려받은 그녀는 단순한 ‘부자집 딸’ 대신 본인에게 닥친 비극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죽음을 초월한 아름다움’, 그것이 그녀의 삶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뉴욕을 떠나 파리로, 자유와 혁신의 공기 속으로

1920년대, 페기는 뉴욕의 화려한 사교계를 떠나 파리 몽파르나스의 예술가 아틀리에로 향했습니다. 그녀는 마르셀 뒤샹, 콘스탄틴 브랑쿠시, 만 레이, 장 콕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탐구했습니다. 뒤샹은 그녀에게 미술의 본질을 바꾸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무엇이 예술인가?”. 그는 ‘아이디어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개념미술의 씨앗을 그녀의 마음속에 심었습니다. 이 만남은 훗날 그녀의 미술관 철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예술은 감상이 아니라 사유다.”

런던의 첫 실험, 예술을 위한 반항

1938년, 페기는 런던에 첫 갤러리 ‘구겐하임 주느(Peggy Guggenheim Jeune)’를 열었습니다. 당시 대중은 아직 입체파나 초현실주의, 추상미술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죠. 그러나 페기는 이 낯선 흐름 속에서 예술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작품을 ‘팔기’보다 ‘구원’하려 했습니다. 예술이 시대를 앞서가고 비난받을 때, 그녀는 그것을 사들여 지켰습니다. 파리에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그녀는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나치로부터 피신시키는 구조자로 변했습니다. 피카소, 달리, 미로, 막스 에른스트 — 그들은 그녀의 도움으로 생존했고, 현대미술은 그렇게 살아남았습니다.

조건을 무시하는 사랑

그녀는 돈이나 지위 같은 세속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상대방과 영혼이 통한다 싶으면 이내 사랑에 빠졌습니다.

첫 남편 로렌스는 재능은 있으나 명성을 얻지 못한 작가이자 시인이며 화가였죠. 생활력이 전혀 없는 한량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는 1922년부터 약 7년간 그와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감수성이 너무 예민한 남자와의 결혼생활은 파란만장했죠. 결국 페기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고 이혼합니다. 그녀는 로렌스를 통해 예술가 인맥을 얻었습니다. 훗날 페기가 화랑 일을 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1887~1968)과의 인연도 로렌스로부터 비롯된거죠.

두 번째 남자는 비록 결혼은 안 했지만 5년간 동거한 존 홈스라는 예술가였습니다. 페기가 존에게서 얻은 것은 예술비평에 대한 통찰력입니다. 존은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꿰뚫고 있는 탁월한 비평가였죠. 하지만 존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며 서서히 무너져갔습니다. 존과 페기의 관계는 존이 간단한 허리 수술 중에 마취상태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면서 끝이납니다. 존의 죽음을 접한 페기의 솔직한 회고에는 한순간 불꽃처럼 타올랐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상함이 잘 드러나 있죠.

뉴욕, 금세기 미술관(Art of This Century)

1942년, 그녀는 뉴욕에 혁신적인 미술관 ‘금세기 미술관(Art of This Century)’를 열었습니다. 벽은 곡선으로 흐르고, 작품은 공중에 떠 있는 구조로 설계되어 관람자가 작품 속을 거니는 듯한 경험을 선사했죠.

1943년 이곳에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첫 개인전이 열리게 됩니다. 페기는 그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의 모든 작품을 구매하며 후원했습니다. “폴록은 내가 낳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다.” — 그 말은 단순한 애정이 아니라, 예술의 방향을 선언한 예언이었습니다.

여성 예술가와 혁신, 그리고 유산

페기는 1943년 자신의 금세기 미술관에서 ‘31 Women’ 전시를 개최하며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소개했습니다. ’31인의 여성을 위한 전시(Exhibition By 31 Women)’는 미국에서 기록된 최초의 여성 작가 전시였습니다. 이 전시회는 당시 가부장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유명 남성 예술가들의 뮤즈, 모방자, 혹은 동반자로 치부되던 여성 예술가들의 공헌을 조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뒤샹, 막스 에른스트, 빌 바, 그리고 페기 구겐하임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죠.

프리다 칼로, 레오노라 캐링턴 등 당대의 여성 작가들을 지원하며, 미술계의 성차별적 관행에 도전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이 전시는 상업적으로 매우 실패했습니다. 작품 세 점만 팔렸고, 유일한 구매자는 구겐하임 본인이었습니다. 또한 일부 언론은 이 전시를 취재하기를 거부했죠.

그러나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구겐하임 갤러리는 이후 전시를 통해 뉴욕 미술계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베네치아의 궁전, 영원한 안식처

전쟁이 끝난 후, 페기는 다시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1949년, 그녀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그란 운하 위에 자리한 궁전 ‘팔라초 베니에 데이 레오니(Palazzo Venier dei Leoni)’를 구입했습니다. 그곳은 곧 세계 현대미술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의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미술관’으로 변했죠. 피카소의 선, 미로의 꿈, 칸딘스키의 색채, 로스코의 침묵, 그리고 폴록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하나의 공간에 공존했습니다.

그녀의 삶은 1979년 베네치아에서 막을 내렸지만, 예술의 왕국과 자유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타이타닉의 차가운 바다에서 시작된 비극이, 세계를 변화시킨 예술의 서사로 이어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