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한 수고가 만드는 기적,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
우리는 결과와 효율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투입 대비 산출이 명확해야 하며, 모든 노력에는 합당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벨기에 출신의 예술가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 1959~)는 이 견고한 믿음에 균열을 냅니다. 그는 ‘걷기’와 ‘반복’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행위를 통해,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헛수고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기적이 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녹아버린 얼음이 남긴 질문 ‘실천의 헛수고’
1997년, 멕시코시티의 뜨거운 거리에서 한 남자가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밀고 가기 시작합니다. 이 작업의 제목은 ‘실천의 헛수고(Sometimes Making Something Leads to Nothing)’입니다.
그는 얼음이 완전히 녹아 한 방울의 물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무려 9시간 동안 도시를 가로지릅니다. 처음에는 거대했던 얼음이 점점 작아지고,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과정은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생산성’에 대한 가장 우아하고도 처절한 비판입니다.
얼음은 녹아 없어졌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알리스는 이 무의미해 보이는 9시간의 여정을 통해 “때로는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목적 지향적인 삶에 매몰된 우리에게, 결과가 아닌 ‘존재하고 움직이는 과정’ 그 자체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입니다.


믿음이 산을 옮길 때, 500명의 신화
2002년 페루 리마 외곽, 거대한 모래 언덕 위에서 전 세계 미술계를 뒤흔든 퍼포먼스가 펼쳐집니다. 성경 구절에서 모티프를 얻은 ‘믿음이 산을 옮길 때(When Faith Moves Mountains)’입니다. 알리스는 500명의 자원봉사자에게 삽을 하나씩 쥐여주고 일렬로 서게 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거대한 모래 언덕의 모래를 삽으로 퍼서 한 걸음 뒤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500명이 온종일 모래를 옮긴 결과, 지름 500미터의 거대한 산은 원래 위치에서 불과 10cm 이동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미미한 변화였지만, 이 행위는 ‘사회적 신화’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고작 10cm를 옮기기 위해 그런 고생을 하느냐”는 냉소적인 질문에 알리스는 예술로 답합니다. 그 10cm는 500명의 공동체적 ‘믿음’이 결합했을 때 비로소 움직였다는 사실입니다. 효율성이라는 잣대로는 결코 측정할 수 없는 집단적 의지의 힘은, 절망적인 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류의 희망을 상징합니다.

경계를 지우는 발걸음, 그린 라인(The Green Line)
알리스에게 ‘걷기’는 단순히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을 관찰하고 지도를 다시 그리는 가장 원초적인 예술 도구입니다. 2004년, 그는 구멍 난 페인트 통을 들고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휴전선인 ‘그린 라인’을 따라 걷습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초록색 페인트 선이 남았습니다.
이 단순한 퍼포먼스는 지도로만 존재하던 차가운 정치적 경계선을 예술가의 신체적 경험과 물리적인 선으로 치환합니다. 그는 걷기를 통해 영토 분쟁의 비극과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장벽의 허무함을 시각적으로 폭로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는 왜 산을 옮겨야 하는가
프란시스 알리스의 작업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오늘 어떤 모래를 옮기고 있습니까?”
세상은 성과와 숫자로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라 다그치지만, 알리스는 얼음이 녹아 없어지는 그 순간의 땀방울과, 모래 언덕을 10cm 옮기기 위해 맞잡았던 500명의 손길에 주목합니다.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무의미한 수고’가 반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보이지 않던 거대한 진실과 마주하고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기적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