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가 주목한 한국 현대미술, 차재민
에르메스 재단이 후원하는 ‘제21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의 최종 수상자로 차재민 작가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지난 3일 에르메스 재단에 따르면, 국내외 미술계 인사 5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장시간의 토론 끝에 차재민을 한국 미술의 다음 세대를 이끌 작가로 낙점했습니다.
이번 심사에는 기혜경 전 부산시립미술관장, 2026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아티스틱 디렉터 최빛나, 리옹 현대미술관 관장 이자벨 베르톨로티(Isabelle Bertolotti), 메종 에르메스 도쿄 르 포럼 아트 디렉터 레이코 세츠다(Reiko Setsuda) 등 국내외 미술계 인사들이 참여했죠.

심사위원단은 차재민 작가가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시스템과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개인의 고통, 그리고 신체적 반응을 집요하게 추적해 온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광합성 하는 죽음 (Photosynthesizing Dead in Warehouse)》은 작가의 예술적 집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광합성 하는 죽음 창고라는 시스템, 그리고 멈춰버린 신체
2024년 작 《광합성 하는 죽음》은 물류 창고라는 현대 자본주의의 심장부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곳은 모든 물건이 효율적으로 흐르는 장소이지만, 그 안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신체는 오히려 정체되고 마비됩니다.
‘광합성’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활동입니다. 하지만 빛이 차단된 창고 안에서 벌어지는 이 행위는, 시스템이 요구하는 규격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거나 기계화되어가는 노동자의 ‘죽어가는 생존’을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차재민은 이 작품을 통해 자본의 속도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소외된 개인의 신체적 통증과 심리적 압박을 다룹니다. 카메라는 화려한 물류 시스템의 이면, 즉 멈춰버린 듯한 개인의 움직임과 감각에 주목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시스템의 폭력성을 직시하게 합니다.


《엘리의 눈(Ellie’s Eye)》: 무엇을 보는가?
차재민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엘리의 눈》은 인간의 심리와 감정이 기술 시스템에 의해 어떻게 데이터로 환원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작가는 단순히 기술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증명하기 위해 기계의 시선에 의존해야만 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포착하죠.
작가는 이 영상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틈새를 드러내는 소재들을 교차시킵니다. 가상 심리 상담사 ‘엘리(Ellie)’는 미군 퇴역 군인들의 PTSD 치료를 위해 개발된 AI입니다. 상담자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목소리 톤을 분석해 심리 상태를 수치화하죠. 일상적인 기기들이 우리의 신체 신호를 어떻게 끊임없이 감시하고 데이터화 하는지를 드러냅니다.

경청과 기다림의 미학
이번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심사위원단은 차재민 작가 특유의 작업 방식에도 주목했습니다. 그는 대상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을 넘어, 오랜 시간 ‘경청’하고 ‘기다리는’ 태도를 견지합니다. 차재민은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 관계를 맺으며 타인의 이야기를 해체하고 다시 엮어내는 ‘에세이 필름’ 형식의 작업을 이어오고 있죠.
작가는 사회적 이슈를 성급하게 결론짓거나 정의하지 않습니다. 대신 영상의 느린 호흡과 에세이 필름 형식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합니다. 이는 기술과 효율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에 인간의 존엄을 환기하는 강력한 장치가 됩니다. 작가의 기존 작품《엘리의 눈》이나 《함성》 같은 전작들에서도 보여주었듯, 그는 의료 시스템, 기술 지상주의, 정치적 함성 등 거대 담론 아래 숨겨진 미세한 신체적 징후들을 포착해 냈습니다.

다음 세대를 향한 질문
차재민 작가는 이번 수상을 통해 2,000만 원의 상금을 받으며, 오는 2025년 가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는 단독 전시를 위해 에르메스 재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됩니다.
심사위원단의 평처럼, “기술과 자본의 틈새에서 인간의 자리를 끈질기게 찾아가는” 그의 작업은 한국 현대미술이 나아가야 할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광합성 하는 죽음》이 보여준 그 서늘하고도 따뜻한 시선이 다음 전시에서는 어떤 형태로 확장될지, 미술계의 눈과 귀가 그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제21회 수상자인 차재민의 개인전은 2027년 5월, 리노베이션을 마친 에르메스 메종 도산 지하 1층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재개관 첫 전시로 선보일 예정인데요. 새로운 공간에서 그의 작품 세계를 직접 마주해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