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줌터가 선사한 유기적 공간, LACMA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
캘리포니아 하늘 아래 들어선 침묵의 마스터피스
빛과 모더니즘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의 심장부가 거대한 건축적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베일을 벗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의 새로운 심장,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The David Geffen Galleries)’가 마침내 개관했기 때문입니다.
세계 건축계의 가장 순수한 설계자로 불리는 스위스 출신의 거장 피터 줌터(Peter Zumthor)가 미국 땅에 남긴 첫 번째 공공 미술관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개관은 전 세계 아트 컬렉터와 건축 애호가들의 시선을 LA 윌셔 블루버드로 집결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소규모의 구도자, 대형 공공 미술관을 짓다
피터 줌터(Peter Zumthor)는 스위스 발스의 온천 요양원(Therme Vals)이나 클라우스 형제 현장 채플(Bruder Klaus Field Chapel)처럼 자연과 긴밀히 호흡하는 소규모의 종교적·비상업적 공간을 주로 고집해 온 인물입니다.
대형 상업 미술관이나 거대 공공 프로젝트를 극도로 절제해 왔던 그의 전통적인 행보를 감안할 때, 이번 LACMA 프로젝트는 매우 이례적이며 파격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집니다. 거대한 자본과 대중의 복잡한 동선이 얽힌 메가 프로젝트 안에서, 피터 줌터 특유의 현상학적 몰입감과 순수한 물질성을 어떻게 유지해 냈는지가 전 세계 건축계의 가장 뜨거운 관전 포인트였죠.

할리우드 거물의 세계 최고액의 컬렉션, 데이비드 게펜
미술관의 이름을 장식한 데이비드 게펜(David Geffen)은 어사일럼 레코드와 게펜 레코드를 설립하고, 스티븐 스필버그 등과 함께 드림웍스(DreamWorks SKG)를 창립한 미국의 전설적인 엔터테인먼트 거물이자 사업가입니다. 그는 문화 산업에서 이룬 독보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현재 개인이 단독으로 소유하고 있는 가장 주목할만한 미술 컬렉션을 구축한 예술 애호가로 명성이 높습니다.
잭슨 폴록, 빌럼 데 쿠닝, 재스퍼 존스 등 현대 미술 거장들의 마스터피스를 망라한 그의 개인 컬렉션은 자산 가치만 2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며, 전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사적 아카이브로 평가받습니다. 게펜은 이번 LACMA 신축 캠페인에 미술관 역사상 단일 개인 기부액 중 최고 기전인 1억 5,000만 달러(한화 약 2,000억 원)를 쾌척했으며, 미술관은 그의 자선적 헌신을 기리기 위해 이 거대한 새로운 회랑을 그의 이름으로 명명했습니다.

윌셔를 가로지르는 유기적 콘크리트
이번 건축의 가장 압도적인 특징은 대지를 대하는 유연한 태도에 있습니다. 미술관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아메바나 연못 위의 연잎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대지 위에 떠 있는 형상을 취합니다.
- 플로팅 구조: 거대한 콘크리트 매스가 지상에서 들어 올려진 형태로 설계되어, 하부의 보행자 공간에 쾌적한 그늘과 열린 시야를 제공합니다.
- 유리 파사드: 독특하게 굴곡진 외벽을 따라 전면 유리가 설치되어, 로스앤젤레스의 역동적인 도시 풍경과 미술관 내부의 예술적 풍경이 경계 없이 교차합니다.
- 수평적 영속성: 높은 탑을 쌓아 올리는 대신 수평으로 길게 뻗은 구조를 선택하여, 관람객이 수직적 피로감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동선을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고고학과 생태학의 각인, 마리아나 카스티요 데발의 커미션 작업
이번 개관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예술적 성취는 멕시코 출신의 세계적인 예술가 마리아나 카스티요 데발(Mariana Castillo Deball)의 거대한 장소 특정적 커미션 작업인 ‘깃털 달린 변화(Feathered Changes)’입니다.
미술관 광장(Plaza) 레벨 전체를 뒤덮는 약 75,000제곱피트 규모의 이 기념비적인 바닥화 작업은, 수천 년 동안 비옥한 습지 생태계였던 미술관 대지의 역사와 부지 조성 과정에서 발견된 풍부한 화석 아카이브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데발은 일본의 고산수식(Zen) 정원에서 모래를 긁어내는 기법과 콘크리트 브러싱 기술을 결합하여 대지 위에 거대한 선을 새겨 넣었습니다.

관람객들은 콘크리트 표면 위에 새겨진 코요테, 곰, 너구리 같은 캘리포니아 토착 동물들의 발자국과 고대 테오티우아칸 벽화에서 영감을 얻은 ‘깃털 달린 뱀(Feathered Serpent)’의 파편화된 도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관람객이 광장을 거니는 행위 자체가 흩어진 고대의 기억과 생태계를 재통합하고 연결하는 거대한 수행적 예술이 되는 셈이죠.

빛과 그림자의 큐레이션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은 완벽히 새로운 공간적 경험을 마주하게 됩니다. 춤토르는 과거 미술관들이 지닌 엄숙하고 관료적인 전시 방식에서 벗어나, 시대와 지역의 경계를 허문 ‘비위계적 배치’를 유도했습니다.
부드러운 미색의 콘크리트 벽면은 인공적인 화려함을 걷어내고 작품 본연의 아우라를 받쳐주며, 천장과 측면의 유리창을 통해 여과 없이 흘러드는 LA 특유의 투명한 자연광은 시시각각 내부의 음영을 바꾸어 놓습니다.

화려한 대리석이나 금속 장식 없이도,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는 극도의 간결함과 재료의 진정성만으로 범접할 수 없는 품격을 뿜어냅니다. 피터 춤토르가 구현한 이 공간은 현대 미술관 건축이 나아가야 할 지속 가능한 미래이자, 물질의 범람 속에서 우리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신성한 쉼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