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을 깨는 꽃망치, 피필로티 리스트(Pipilotti Rist)
어둡고 적막한 화이트 큐브를 걷다 보면, 가끔은 예술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숨이 턱 막힐 때가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을 이해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 말이죠.
하지만 스위스 출신의 비주얼 아티스트 피필로티 리스트(Pipilotti Rist)의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런 긴장감은 무장해제됩니다. 그녀의 전시장 안에서 관객들은 뒷짐을 지고 정색하는 대신, 바닥에 눕거나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총천연색 영상미에 흠뻑 젖어듭니다.

밴드 무대에서 미술관으로 난입한 ‘말괄량이 삐삐’
그녀의 이름은 본명인 엘리자베스 리스트에 동화 속 주인공 ‘삐삐 롱스타킹’을 합친 것입니다.
이름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그녀의 이력은 80년대 포스트 펑크 밴드 ‘레 뒤 퓌트(Les Reines Prochaines)’에서 시작됩니다. 무대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퍼포먼스를 펼치며 대중문화의 생리를 몸소 체험한 그녀는, 당시 주류 미디어였던 뮤직비디오가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성적 대상화된 모습의 여성의 이미지 대신, 그녀는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를 스크린에 쏟아붓기로 결심합니다. 카메라를 신체 구석구석에 밀착시키고, 의도적으로 초점을 흐리거나 색을 과하게 덧칠하며 우리가 알던 ‘여성의 몸’을 낯선 풍경으로 재구성한 것이죠.

폭력조차 우아하게, 유리창을 깨는 꽃망치
그녀를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올린 대표작 <에버 이즈 오버 올(Ever is Over All)>(1997)은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통쾌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힙니다.
두 개의 스크린이 교차하는 영상 속에서,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열대 식물 모양의 망치를 들고 길을 걷습니다. 그녀는 마치 꽃밭을 산책하듯 경쾌한 발걸음으로 주차된 자동차 유리창을 박살 냅니다.
범죄 현장임에도 배경에는 몽환적인 멜로디가 흐르고, 지나가던 여성 경찰은 그녀를 제지하기는커녕 다정한 목례를 건네며 지나칩니다. 유리 파편이 보석처럼 흩어지는 이 파괴의 순간은,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해온 ‘정숙함’이라는 틀을 때려 부수는 상징적 의식과도 같았죠.

비욘세의 오마주? 혹은 카피 – ‘Hold Up’
재미있는 점은 이 발칙한 파괴의 미학이 20여 년 뒤, 팝의 여왕 비욘세(Beyoncé)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사실입니다.
비욘세는 자신의 앨범 Lemonade의 수록곡 ‘Hold Up’ 뮤직비디오에서 피필로티 리스트의 이 장면을 노골적이고도 완벽하게 오마주합니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비욘세가 야구 방망이 ‘Hot Sauce’를 휘두르며 거리의 차들을 부수는 모습은 리스트의 영상 속 주인공과 몹시 닮아 있습니다.
리스트가 일상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노래했다면, 비욘세는 사랑과 배신이라는 사적인 분노를 공적인 파괴의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죠. 현대 미술의 전유물이었던 ‘우아한 폭력’이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생명력을 증명한 셈입니다.

내면의 우주를 유영하다, <픽셀 포레스트>
리스트의 또 다른 야심작 <픽셀 포레스트(Pixel Forest)>(2016)는 영상이 단순히 평면 속에 갇혀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수천 개의 LED 전구가 마치 거대한 숲처럼 천장에서 내려오고, 빛은 영상의 리듬에 맞춰 파동처럼 움직입니다. 이 공간에 들어선 관객은 마치 세포 속을 걷거나 거대한 뉴런 사이를 지나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리스트는 디지털 픽셀을 공간으로 끄집어내어, 차가운 기술을 따뜻한 감각의 경험으로 치환했습니다.

평단이 반한 ‘유쾌한 전복’
평단은 그녀를 향해 “비디오 아트를 명상의 영역에서 육체적 경험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보냅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예술을 넘어, 온몸의 감각을 건드리는 ‘몰입형 예술’의 선구자라는 평가죠. 물론 “지나치게 화려하고 대중적이다”라는 일부의 시선도 있지만, 그녀의 작품이 지닌 강력한 흡입력 앞에서는 그런 비판조차 무색해집니다.
피필로티 리스트가 구축한 세계는 결국 ‘자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성의 몸은 수치심이나 관찰의 대상이 아닌, 꽃과 나무처럼 자연스러운 생명력을 지닌 대지로 그려집니다. 남성 중심적인 시선으로 편향되었던 여성주의 미술에 위트와 팝아트적 감수성을 불어넣었다는 점이야말로 그녀가 남긴 독보적 발자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