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담은 다도실, 비트윈 스페이스 앤 사운드
기능은 감정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는 공간을 시각과 촉각으로 인지하는 데 익숙하지만, 때로는 보이지 않는 ‘소리’가 공간의 부피와 밀도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가리모쿠 리서치 센터의 전시 《Survey 03: Form Follows Feelings》는 바로 이 지점, ‘기능은 감정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뉴욕과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오디오 디자이너 데본 턴불(Devon Turnbull)은 이번 전시에서 오디오 부스 겸 다실인 <Between & Sound Space>(2026)를 선보이며, 소리를 듣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깊이 있는 공간 경험으로 풀어냈습니다.

일본의 목공 기술로 구현한 어쿠스틱 철학
이번 프로젝트는 2025년부터 이어온 가리모쿠 퍼니처와 데본 턴불의 지속적인 협업이 이뤄낸 결실입니다.
창고처럼 거대하고 차가운 전시장 한편에 들어선 회색빛 정육면체의 방은 턴불이 지닌 독보적인 어쿠스틱 철학을 일본의 정교한 전통 목공 기술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전시는 소리와 공간,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간격을 천천히 들여다보도록 유도합니다.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삼차원의 미학, ‘마(間)’
이 전시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일본 전통 미학의 ‘마(間)’입니다. 이는 서구의 ‘공간’이나 단순히 비어 있는 ‘여백’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사물과 구조물 자체보다, 그 사물들이 놓임으로써 비로소 생겨나는 ‘비어 있는 간격과 관계성’에 본질적인 가치를 두는 접근입니다. 턴불은 이 개념을 세 가지 차원으로 확장해 소리와 공간의 관계를 재정의합니다.
- 물리적 간격 : 사물과 사물이 존재하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최적의 거리감입니다. 오디오 부스 내부의 가구와 장식을 극도로 덜어내고 최소한의 좌석만 남겨둠으로써, 스피커와 감상자 사이의 공기를 온전히 확보합니다. 이 비워진 공간은 소리가 왜곡 없이 가장 아름답게 울리고 머무를 수 있는 최상의 그릇이 됩니다.
- 시간의 리듬 : ‘마’는 공간을 넘어 음표와 음표 사이에 존재하는 찰나의 침묵으로 이어집니다. 외부 소음이 완벽히 차단된 부스 안에서 관람객은 사운드가 연주되는 순간뿐 아니라, 소리가 소멸하고 다음 소리가 시작되기 직전의 ‘고요한 리듬’까지 감각하게 됩니다. 침묵을 소리의 반대가 아닌, 소리를 완성하는 필수 요소로 바라보는 미학입니다.
- 심리적 관계성 : 공간에 머무는 인간과 인간, 혹은 주체와 사물 사이의 정서적 간격입니다. 턴불이 디자인한 낮은 좌석에 몸을 낮추어 앉는 행위는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태도를 유도합니다. 이 안에서 감상자는 일방적인 관객이 아니라 공간의 울림과 동화되는 유기적인 일부가 됩니다.

침묵과 음악만 남은 공간, ‘사운드 하우스’
전시장 중앙에 독립된 구조로 놓인 ‘사운드 하우스’는 바로 이 ‘마’의 미학을 보여주는 일본의 전통 다실(茶室)에서 착안한 부스입니다.
둥근 입구를 지나 방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외부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차단됩니다. 내부에는 턴불이 디자인한 최소한의 좌석만이 배치되어 있어, 방문객은 자연스럽게 몸을 낮추고 정적인 자세로 앉게 됩니다.
방의 중앙에는 턴테이블과 함께 이번 협업을 위해 특별히 개발된 세 가지 스피커인 ‘산조(Sanjo)’, ‘로쿠조(Rokujo)’, ‘누리카베(Nurikabe)’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공간을 완성하는 목재 혼 스피커는 가리모쿠가 자랑하는 최첨단 3D 가공 기술로 제작되었습니다. 기존 오디오 시스템의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 중심 구조를 따뜻한 목재의 물성으로 완벽히 치환해 낸 이 스피커는, 시각적 우아함은 물론 소리의 잔향까지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기술이 어떻게 감동으로 이어지는지 증명하죠.

소리의 본질을 마주하는 청각적 명상
<Between & Sound Space>의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소리가 얼마나 강력한 공간의 건축 자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데본 턴불과 가리모쿠가 완성한 이 작은 방은 시각적 자극이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모든 감각을 귀로 집중시키는 일종의 청각적 명상 센터와 같습니다.
화려한 장식과 소음을 지워낸 자리에 음악과 침묵, 그리고 그 사이의 간격만이 또렷하게 남아 흐르는 이 공간은,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온전한 경청’의 가치를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