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납과 재로 빚어낸 인류의 기록,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침묵을 깨는 목소리

1945년,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에 태어난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는 어린 시절을 말 그대로 전쟁의 잔해와 폐허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전후 독일 사회가 애써 외면하고 침묵해온 나치의 어두운 과거를 예술의 수면 위로 과감하게 끌어올렸죠. 초기 작업에서 나치식 경례를 하는 도발적인 퍼포먼스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그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대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꾸준히 기록해 왔습니다.

Anselm Kiefer: the artist creating a monumental legacy without finishing a  painting - The Art Newspaper - International art news and events

납, 모래, 그리고 타버린 짚이 주는 생동감

안젤름 키퍼의 작품 앞에 서면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인 거칠고 묵직한 질감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그는 물감 대신 실제 납(Lead), 모래, , 말린 짚 같은 재료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특히 그가 즐겨 쓰는 ‘납’은 연금술에서 황금으로 변하기 전의 상태를 의미하면서도, 스스로 부식되어가는 성질을 지니고 있죠. 시간이 흐르며 색이 변하고 바스러지는 이 재료들은, 작품 자체가 역사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하나의 살아있는 증거물이 되게 합니다.

A new exhibition highlights how German artist Anselm Kiefer was inspired by  Vincent van Gogh | News, Sports, Jobs - Marietta Times

대표작을 통해 본 역사의 소멸과 숭고함

키퍼의 예술 철학은 그의 거대한 작업물들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1977년 작품 <바라와(Varus)>는 눈 덮인 차가운 숲속 오솔길을 극단적인 원근법으로 그려내어, 관객이 마치 독일의 비극적인 역사 현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숲이라는 상징적 장소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죠.

Anselm Kiefer | Varus (1976) | Artsy

또한 밀라노에 설치된 <지혜의 일곱 궁전(The Seven Heavenly Palaces)>은 그의 예술적 야심을 보여주는 정점입니다. 최대 18m 높이에 이르는 일곱 개의 거대한 납과 콘크리트 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폐허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관객은 이 거대한 탑 사이를 걸으며 인류 문명의 화려한 도약과 필연적인 쇠락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These are Anselm Kiefer's teetering towers

영원한 폐허: 바르작(Barjac)에 세운 거대한 예술 창고

그의 예술적 정점은 프랑스 남부 바르작에 위치한 거대 작업실 ‘라 리보트(La Ribaute)’에서 완성됩니다. 수십 개의 건물과 지하 터널, 거대한 납 조각상들이 흩어져 있는 이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생태계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자연의 비바람에 작품이 변해가는 과정을 내버려 두며, 예술이 완성된 고정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재생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안젤름 키퍼에게 예술이란 잊혀가는 기억을 붙잡아 두는 수단이 아니라, 세월과 함께 부식되며 역사의 본질을 증명하는 영속적인 기록입니다.

Anselm Kiefer Has Left the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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