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 위작 사건② 불투명성과 무너진 신뢰
인위적인 세월의 제조법
위작의 완성은 눈에 보이는 앞면이 아닌, 작가의 역사가 기록된 뒷면에서 결정됩니다. 1970년대 후반의 작품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이들은 시간을 위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공수한 후나오카 캔버스와 스키나무(삼나무) 틀을 기반으로, 캔버스를 고정하는 못 하나까지도 세밀하게 조작했습니다. 새 못을 소금물에 담가 강제로 녹슬게 한 뒤 나무틀에 박아 넣어, 마치 40년의 풍파를 견뎌온 듯한 가짜 갈변 현상을 연출했습니다. 심지어 캔버스 뒷면에 커피색 물감을 스프레이로 뿌려 고색창연한 미감을 덧씌우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심층추적] 이우환·천경자 화백 사건으로 본 '위작의 세계' < 사회 < 기사본문 - 월간중앙](https://cdn.m-joongang.com/news/photo/201611/20161122_4_314294.jpg)
기하학적 완벽함과 레이저의 배신
이우환의 철학적 여백을 흉내 내기 위해 이들은 역설적으로 가장 현대적인 도구인 레이저 수평기를 도입했습니다. 건축 현장에서나 쓰이는 이 기구로 일직선의 기준을 잡은 뒤, 그 선을 따라 점과 선을 배열함으로써 인간의 손이 낼 수 없는 기하학적 정교함을 확보했죠. 또한 작가의 서명과 일련번호는 포토샵으로 정밀하게 추출한 뒤 빔프로젝터를 통해 캔버스에 투사하여 0.1mm의 오차도 없이 베껴냈습니다. 이는 거장의 신체적 수행성을 데이터의 복제로 대체하려는 오만한 시도였습니다.
안목 감정의 한계와 과학적 시선
전문가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이들의 집요함은 경이로울 정도였으나, 최명윤 소장을 비롯한 진정한 안목 앞에서는 허점이 드러났습니다. 진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교의 수축으로 인해 미세한 손상이 발생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위작범들이 급조한 작품은 지나치게 매끄럽고 생경했습니다. 분무기로 물을 뿌려 강제로 나무를 노화시킨 흔적과, 나무틀에 묻은 현대적 스프레이 자국은 그들이 급조한 세월의 허구성을 고발했습니다. 인위적으로 박제된 시간은 자연이 빚어낸 숭고한 노화의 깊이를 결코 모방할 수 없었죠.

세탁된 소장 경위와 ‘나카마’의 존재
위작이 진품의 지위를 획득하는 마지막 단계는 권위 있는 이력 조작입니다. 이우환 위작들은 일본의 소장가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작품인 것처럼 교묘하게 소장 경위가 세탁했죠. 국내에서는 확인이 어려운 해외 유통망, 이른바 ‘나카마’를 거치며 가짜는 신비로운 출처를 입게 됩니다. 홍콩의 아트바젤과 같은 국제적인 아트 페어에 출품되어 전시 이력을 쌓는 과정은, 부정한 탄생을 감추고 공신력을 얻기 위한 일종의 ‘예술적 신분 세탁’과 다름없었습니다.
![심층추적] 이우환·천경자 화백 사건으로 본 '위작의 세계' < 사회 < 기사본문 - 월간중앙](https://cdn.m-joongang.com/news/photo/201611/20161122_2_314294.jpg)
감정 기관의 구조적 모순과 화랑의 카르텔
이 사건은 한국 미술 시장의 고질적인 병폐인 감정 체계의 비전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감정 기구의 등기이사가 대부분 화랑 주인들로 구성된 인적 구조는 이해 상충의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여야만 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는 감정 시스템 속에서, 객관적인 과학적 검증은 종종 안목이라는 이름의 주관적 독단에 밀려나곤 했습니다. 일련번호가 중복되는 작품들이 버젓이 경매 시장을 떠도는 현실은 신뢰가 붕괴된 시장의 현주소였습니다.

예술적 가치와 자본의 윤리
이우환 위작 사건은 제2의 천경자 미인도 사건으로 불리며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호흡이 담겼다”고 선언하면 과학적 증거는 무용지물이 되는가? 혹은 자본의 논리에 매몰된 시장이 가짜를 진짜로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프랑스식 사법감정사 제도 도입과 유통 구조의 투명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예술이 지닌 숭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캔버스 너머의 복마전을 걷어내고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와 철학적 성찰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