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주사위로 결정한 춤, 메르스 커닝햄

서사 대신 움직임 그 자체

과거의 무용은 음악의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특정한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현대 무용의 판도를 뒤흔든 메르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은 이 익숙한 문법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무용이 무언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인간의 몸짓이 지닌 본연의 움직임과 공간에만 집중했습니다.

관객이 무대 위에서 슬픔이나 기쁨을 억지로 찾아내려 할 때, 커닝햄은 오로지 근육의 떨림과 이동 경로라는 물리적인 현상만을 제시하며 현대 무용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습니다.

Merce Cunningham's Legacy Is Celebrated With a "Night of 100 Solos"

주역과 주사위가 결정하는 동작

커닝햄의 작업 방식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안무가의 의도를 철저히 배제하는 ‘찬스 오퍼레이션(Chance Operation)’입니다. 그는 안무를 짤 때 자신의 취향이나 습관이 개입되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주사위나 동전을 던져 무용수의 위치, 동작의 순서, 이동 경로를 즉흥적으로 결정했습니다. 동양의 철학인 ‘주역’에서 영감을 받은 이 방식은 사람이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하는 기묘한 조화와 긴장감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Merce Cunningham. Suite by Chance Movement Notations. IE. 1952 | MoMA
머스 커닝햄 <우리의 발음곡 악장 표기법> 1952

존 케이지와의 운명적 조우

커닝햄이 이토록 파격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평생의 동반자이자 음악가인 존 케이지(John Cage)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워싱턴 출신의 커닝햄은 1930년대 후반 시애틀의 콘월 예술대학에서 무용을 공부하던 중, 당시 반주자로 활동하던 존 케이지를 처음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춤과 음악이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예술적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는 공연 당일 무대 위에서 춤과 음악이 처음 만나는 전례 없는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스승인 마사 그레이엄의 극적인 무용 세계를 떠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커닝햄의 삶은, 곧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움을 구축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John Cage and Merce Cunningham - by Tyler King
(좌) 메르스 커닝헴 (우) 존 케이지

연습실의 침묵과 무대의 조우

커닝햄과 존 케이지는 협업 과정에서 ‘공연 당일 전까지는 서로의 결과물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기이한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무용수들은 음악 없이 오로지 초시계의 타이밍에 의존해 안무를 익혔고, 작곡가는 춤의 동작을 모르는 상태에서 곡을 썼습니다. 춤과 음악이 독립적인 궤도를 그리다 무대 위에서 비로소 우연히 만나는 이 방식은, 안무가 음악의 배경으로 전락하지 않고 대등한 예술적 에너지를 뿜어내게 만든 결정적 한 수였습니다.

각자의 논리로 탄생한 소리와 몸짓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찰나의 순간은 그 자체로 완벽한 예술적 독립을 의미했죠.

FilterD Extra: John Cage, Merce Cunningham film screens at CCS – Model D

기술로 확장한 신체의 한계

기술의 변화에도 민감했던 커닝햄은 노년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고 안무용 소프트웨어인 ‘라이프폼스(LifeForms)’를 도입했습니다.

그는 화면 속 가상의 모델을 통해 인간의 관절이 물리적으로 소화하기 힘든 각도와 속도를 실험했습니다. 컴퓨터가 내놓은 결과값은 무용수들에게 기존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동작을 요구했고, 이는 곧 커닝햄만의 독창적인 테크닉으로 굳어졌습니다.

인간의 직관이 아닌 데이터가 설계한 움직임은 오히려 인간적인 몸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PDF] A case study of Merce Cunningham's use of the LifeForms computer  choreographic system in the making of Trackers | Semantic Scholar
라이프폼스(LifeForms)

체스판 위의 열린 결말

커닝햄의 무대는 완성된 결론이 아니라 늘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그는 관객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는 전통적인 원근법을 버리고, 무대 위 모든 지점이 똑같은 비중을 갖도록 안무를 흩어 놓았습니다.

무대 위에 정해진 주인공도, 정답과 같은 감동의 지점도 없기에 관객은 스스로 보고 싶은 움직임을 선택하며 각자만의 방식으로 무대를 즐기게 됩니다. 주사위를 던져 만들어낸 무질서가 역설적으로 가장 완벽한 자유를 만들어낸다는 사실, 그것이 커닝햄이 우리에게 남긴 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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